복잡한 서울거리를 다니다가 광화문광장에 다다르면 가슴이 뻥 뚤린다. 저 멀리 푸른 하늘에는 구름이 한가하게 흐르고 그 아래 경복궁을 지켜주는듯한 북악산이 병풍처럼 펼쳐있다. 청와대가 보이는듯 마는듯 숨어 있고 경복궁이 눈 앞에 펼쳐진다. 광장에는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존경하는 인물 1,2위의 세종대왕 동상이 늠름하게 앉아있고 이순신장군 동상이 우뚝 서있다.
경복궁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였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궁궐과 함께 종묘, 사직, 성곽, 사대문 등을 짓기 시작했는데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했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왕자의 난 등이 일어나면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는 등 조선 초기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경복궁은 궁궐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비로소 이곳이 조선 왕조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시의 대규모 화재를 비롯한 작고 큰 화재,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따른 백성들의 원성 원망, 겨우 50여 명의 사무라이에 의한 한 나라 왕궁의 유린과 국모 명성황후의 시해, 두번(1914, 1929)에 걸친 일제의 시정기념 박람회를 위해 대부분의 전각이 헐린 수모, 흥례문을 허물고 세운 조선총독부, 차 아무개의 무소불위한 국기하례식.....
조선의 도읍지인 한양은 주산인 백악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좌청룡으로서 낙산, 서쪽은 우백호로서 인왕산, 안산으로서 남산, 조산으로서 관악산 등 사진사의 구조로 경복궁의 터를 잡았다 한다. 사각형을 이루는 경복궁의 동은 건춘문, 서는 영추문, 남은 광화문, 북은 신무문이라 이름 지었고, 왕의 침전은 강녕전, 중전의 침전은 교태전 등등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주역의 음양오행설, 풍수지리학, 서경의 홍범편 등 중국의 문헌 등을 기초로 하여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의미를 부여하여 조선왕조의 영원한 영광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씨왕조의 영원한 영화만을 기원한 것일까? 아니면 백성들의 고달푼 삶도 염두에 둔 것일까? 역성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전쟁 한번 해보지 못하고 나라를 통채로 가져다 바치다니.....
나는 풍수지리설이나 주역 등을 신봉하는 경향은 이니지만, 그리도 풍수에 정통했다면, 경복궁 터가 500년이 지나면 한나라 도읍지로서의 진기를 다 할 것이라고 왜 예언을 못했을까 생각 해본다. 만일 풍수지리설이 신빙성이 있고 그런 예언이 있었더라면, 천도를 해서 조선조가 계속 이어졌을 것이고,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남북분단의 민족적 대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함에 있어서 내탕금이 워낙 부족하여 백성들에게 강제 기부금을 징수하였는데, 1만량을 내는 사람은 상민이라도 벼슬을 주었고, 10만량이면 수령에 임명하였다. 이때 발행한 돈이 당백전이라 하는데,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 하여 원납전이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국력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지금 경복궁을 당초 모습대로 재건하고 있는데 재정문제는 그 말 많은 야당의 시비거리 조차 되지 않고있다) 7,700여칸의 건물을 세우기 위하여 노동력을 강제 동원하고, 문세, 결두전 등의 세금을 징수하여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국가재정에 혼란이 야기하는 등 얼마나 나라가 시끄러웠는가?
나라가 얼마나 허약하였기에, 조선조 건국초기에 1년만에 창건(그 뒤 3년에 걸쳐 증축했지만) 한 경복궁을 겨우 4개 전각만 중건하는 데도 국력을 소진하였으니 서글프기만하였다. 창업보다 수성이 더 힘들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가 보다. 이는 불과 140년전의 근대사이므로 정확한 기록이다. 강제동원한 인부들의 식사는 육조의 벼슬아치에게 분담시키기도 하였다 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의문이 든다. 조선 건국초기 새 도읍에 도성도 쌓고 종묘.사직 등 여러 부속건물도 지으면서 경복궁을 창건했고, 임진왜란 후 광해군은 소실된 창덕궁, 창경원 등을 재건하는 한편 경희궁까지 지었는데 그 재원을 어떻게 충당했는지 궁금하다. 임진왜란으로 국고가 바닥이 났을텐데 백성을 수탈하여 궁궐을 재건했을가? 광해군이 쫓겨나는 이유 중 하나는 궁궐을 짓느라고 국고를 탕진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만한 국고는 있었을가? 한마디로 조선말기에는 국정이 총체적을 엉망진창이었다는 얘기 밖에 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돌리면 1996년 12월에 조선총독부(중앙청)건물을 철거할 때 반대여론이 좀 많았는가. 그분들은 꼭 다시 복원된 경복궁을 와 보셔야 할 것이다. X고집으로 지금도 자기 주장이 옳다고 떠드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마음속에는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역사는 항상 그래왔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곤 한다. 흥례문(조선총독부 자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북악산과 인왕산은 얼마나 웅장하고 수려하고 가슴이 확 뚤리는가.
서울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에, 가치있고 조선조 500년의 주무대였던 역사가 깃든 왕궁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더구나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 조선조 5궁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왕궁이, 가장 교통이 좋은 곳에 있으니 이를 두고 금상첨화라 할 수 있겠다.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어디보다 먼저 경복궁과 옆에 있는 고궁박물관을 안내하고 싶다. 이 두 곳만 안내하면 한국역사의 절반은 소개하는 셈이 되지 않을까?
한마디 덛부치면, 조선의 건축기술은 대단한 수준인데, 근정전 앞에 넓게 깔린 薄石(화강암)에는 비밀이 있는데, 돌의 표면이 적당히 우툴두툴하여 가죽신을 신은 신하가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햇빛을 난반사시켜 땡볕에도 눈이 부시지 않도록 하였으며 비가 오면 빗물이 박석 이음새를 따라 근정전 남쪽행각의 동쪽 끝으로 흘러서 배수가 되도록 하였다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명언을 남긴 문화유산 전도사 유홍준 교수에 의하면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여기에 와 보면 빗물이 박석 이음새를 따라 제 길을 찻아가는 그 동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고 한다. 이만큼 우리 옛 장인들의 지혜는 감탄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