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거사하신 지 85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윤봉길 의사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투탄의거를 하였는데요, 그것은 결코 헛된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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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윤의사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아서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후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운동 등을 시작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합니다.
그러다가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가려다가 일경에 의하여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윤의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야채장사를 하던 중 만주사변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죽을 자리가 없어졌다."라며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金九) 선생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 달라"라고 부탁합니다. 그렇게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에 몸 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승리로 장식한 일본군은 중국 국민당군에게 굴욕을 안기고 상하이 훙커우(홍구) 공원(현재의 루쉰 공원)에서 일왕 생일인 천장절 기념 행사와 전승 기념 행사를 열기로 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이 현장에서 폭탄을 투척하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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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장군>
폭탄은 김홍일 장군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습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 국민혁명군에 복무하며 병기창 주임을 맡아 각종 병기, 탄약을 독립운동가들에게 공급하기도 한 폭탄 제조 전문가로 이봉창 의사의 폭탄도 만들었습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 때는 폭탄의 위력이 약하고 던진 거리가 멀어 거사에 실패하였는데, 이를 교훈 삼아 보다 가벼우면서도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폭탄 제조에 나섰고, 병공창에서 시험까지 하여 완벽한 폭탄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김홍일 장군은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 두 개를 준비하여 윤봉길 의사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당일 행사가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 도시락 지참이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흔히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고 하지만. 실제 도시락 폭탄은 자폭용으로 준비한 것이었고, 의거용으로 준비한 것은 물통 폭탄이었습니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어서 군악이 울려 퍼지고 열병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 휘말리지 않도록 외교관과 내빈들이 빠져나가길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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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
11시 50분 기미가요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준비한 물통 폭탄을 힘차게 던졌습니다.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 의사가 다시 바닥에 놓아둔 도시락 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폭탄 의거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을 죽이고, 총영사 무라이,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 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독립투쟁에 적극 나섭니다.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제조한 김홍일 장군은 한국광복군 참모장이 되었다가 광복 후 일시 중국군에 복귀한 후, 귀국하여 국군에 입대하여 중장으로 예편하고, 조국의 근대화와 민주화에도 기여하다가 1980년 8월 8일 사망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총살당했습니다. 유해는 아무렇게나 암매장되었다가 광복 후 발굴되어,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서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되고 같은 해 6월 29일 기념사업회가 설립되는 그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 9월에는 일본 이시카와현에 있는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 앞에 극우 일본인에 의한 말뚝 테러가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와 같은 독립투사들이 보여준 독립의지는 카이로 회담에 반영되어 연합국 수뇌가 한국독립을 약속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보여준 독립의지와 나라사랑하는 마음, 의연한 희생정신은 이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청년들이 우러러 본받아야 할 만고불변의 사표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않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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