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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蟲夏草(동충하초)

도솔9812 2013. 2. 12.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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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蟲夏草(동충하초)

   최근 T.V.에서는 겨울에는 곤충이고 여름에는 약초로 변태하는 신비의 생물체를 소개한 바 있다. 소위 동충하초라는 것이다. 동충하초는 고대 중국으로부터 귀한 한방 약재로 이용되어 왔고 최근에는 높은 항암효과, 마약중독의 해독제, 해충 방제를 위한 천연 생물 농약제로서 효능도 밝혀짐으로서 크게 주목받게 된 생물이다.

자연에서 희귀하게 발견되고 있는 것을 최근 누에의 번데기 등에 균사를 주입하고 인공 배양하여 귀한 약재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이 생물체의 신비나 그 약효를 더듬어 보려는 것은 아니다.

동충하초와 같은 생물의 변태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피상적으로나마 음미해 보려는 것이다.
  
어떤 생물체가 한철에는 동물이다가 계절이 바뀌면서 식물로 변한다면  아주 신기하게 보이겠지만,
알고보면 그렇게 신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실은 버섯의 한 무리인 동충하초균이 살아있는 벌, 매미, 잠자리, 딱정벌레 같은 곤충의알, 애벌레,번데기,성충의 외피에 부착 발아관을 만들어 곤충의 체내로 침입한 후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균사를 뻗어 곤충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껍질만 남은 채 균사로 꽉 채워진 곤충의 시체는 균사에 불리한 환경인 겨울 동안 그 외형을 유지하다가 이듬해 여름에 균사가 자라서 버섯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우리는 동물이 식물을 먹고 사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 들이지만 식물이 동물을 잡아 먹는 것은 기이한 일로 보게 된다.

끈끈이 주걱, 통발과 같은 식충 식물은  살아 있는 동물을 먹이로 이용한다.

이런 경우는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어서 좀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대부분의 동물은 죽어서 미생물이나 식물의 영양분이 된다. 또한 많은 하등 기생 식물(실은 균류임)이 동물의 몸에 기생하여 살아가고 있다.

생태계의 먹이 사슬을 보면 잡아 먹기만하고 먹히지 않는 생물은 한 종도 없다.

    어떤 거미류의 일종은 알에서 갓 부화하자 어린 것들이 어미의 몸을 먹고 자라고, 어린 것들에게 모든 영양분을 빨린 어미는 죽어 간다. 그 순간을 보면 참으로 잔인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죽음을 음미해 보면 죽어 타종의 먹이가 되는 것보다 동종의 많은 후손에게 자기의 영양분을 모두 나누어 주고 가는 삶이 된다.

이 또한 하나의 삶의 형태로 그 가치의 우열을 우리의 관점으로 쉽게 평가한다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닐 것이다.

 

    


    생의 존속에 관하여 어떤 이는 전생이 있다 하고 어떤 이는 환생을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영생을 믿는다.

그러한 것은 눈으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과학적인 설명이나 입증이 불가능하다. 실재하는 것인지, 영적인 문제인지 나로서는 알수 없는 신비일 뿐이다.

내자신의 믿음이 부족해서인지 경험이 부족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환생이나 전생을 경험했다는
책자들을  읽어 보면 논리의 비약이 심한 것 같고 경험해 보지 못한 절대다수를 우롱하는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반면에 생물체의 변태는 우리의 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가 한 생명체의 일생을 정의할 때 보통  
그 개체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를 국한하여 말한다.

삶의 의미를 보다 넓혀 생각해보자. 후손에게 자신의 유전인자를 물려주는 것, 장기이식으로 자신의 생명체를 타인에게 이식하는 것,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는 것, 죽어 식물의 거름이 되는 것 까지도 생물체의 존속으로 생각한다면 사고의 비약이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전생이나 환생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고 자신만의 꿈같은 경험을 내세우는 것보다는 좀더 사실적이고 또한 겸허한 자세가 아닐까?

일반적인 한 개체의 일생에 국한하지 않고 생명체의 변태나 존속을 본다면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도 중요한 삶의 과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상에 태어난 자신이라는 고정관념에 너무나 집착하여 살고 있는 것같다.

내가 출생시에 받은 이름이 중요하고 그것을 좀더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인간으로서 중요한 일이 겠으나 대부분 그 이름을 지키려고 너무나 아집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닐가.  

우리는 수정란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단 일초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존재해 본 적이 없다. 무릇 생명체는 어버이로 부터 수정란을 이어받아 발생을 거쳐 태어나는 것과 같이 우리의 개체도 사는 동안이나 죽어서 다른 형태로 변하며 존재한다.

한 개체로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항시 같은 형태로 유지되지 않는 우리가 아닌가.  그런데 육체가 죽고 영생한다고 할 때 어떻게 꼭같은 형태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번데기와 버섯이 합쳐 동충하초라는 개체로 탈바꿈하듯이 우리도 변한다. 한번도 변하지 않는 일정한  이름의  존재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삶의 가치는 어떤 시점의 자기라는 존재를 고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변태해 가는가에 있는 것이 아닐까. 동충하초가 약효가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잘 살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살았다는 뜻일 것이다. 내 자신의 이름 석자에 너무 큰 미련이나 가치를 둔다면 유기체로서의 활력은 줄어들 것이다.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믿고 나의 생명과 연관된 모든 형태의 변태를 받아들일 때 삶의 폭도 넓어지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약간은 줄어들 것 같다.
 
항상 변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면서 어제 품었던 타인에 대한 분노를 잊지 못하고, 내가 가진 과거의 죄 의식, 열등 의식에서 벗어나지못하는 인간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수 많은 번뇌 속에 살아간다.

아마 이것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생명력이나 활력이 없는 것일수록 외형은 좀더 딱딱하고 오래 유지되는 수가 많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스스로 그 모습을 변모시키지 못한다.

동충하초의 번대기속의 진짜 영양분은 하초로 변해 약초가 되지만 딱딱하게 굳어있는 곤충의
각질은 그대로 그 모습을 남긴다. 인간들은 이 껍질을 보고 이름을 부친다.

이미 쓸모 있는 유기체로 변한 뻔데기 속의 영양분에 대해서는 별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조상을 받드는데 있어서도 그 유덕을 기리기 보다 그 이름을 앞세우려 하고 커다란 묘지나 비석으로 현란한
껍질을 만들려고 한다.

나만을 지키려는 아성이 하찮은 껍질이 되어 나를 감싼 채 자신을 쓸모없는 무생물로 전락시켜 사라지게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昭汀 이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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