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자료/명화

노인과 여인

도솔9812 2013. 3. 4. 08:15
 
노인과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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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리코'의 국립미술관에는 두 손을 뒤로 돌려 묶인 한 노인죄수가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이 있다.


언뜻 보기에도 "노인과 여인" 은 노인과 젊은 여자사이의

부자유스러운 애정행각을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림을 본 방문객들도 이구동성으로

"어떻게 이런 싸구려 그림이 국립미술관의 중앙을 장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미술관의 입구 정면에..." 하면서 불쾌한 감정을 표출하곤 한다.


푸른 수의를 입은 주책스런 노인과 이성을 잃어러린 젊은 여성은

마치 가장 부도덕한 인간의 한 유형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도데체 작가는 어떠한 의도로 이 불륜의 현장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말일까.

이 그림은 정말 3류 포르노인가?


사실을 알 길 없는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노인의 부도덕을 통렬히 꾸짖는다.

어인 까닭으로 이 망측스러은 그림이 국립미술관의 정 중앙 입구를 차지하고 있을까.


푸른 수의를 입고서 손을 뒤로 돌려 묶인 노인은 젊은 여인의 아버지라고 한다.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 내 놓고 있는 여인은 바로 노인의 딸이었다.


이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다.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하여 고문한 후 감방에 가두고 형벌을 내렸다.


이른바 '음식물 투입 금지' 라는 것이었다.

노인은 감옥에서 빠삐욘처럼 서서히 굶어 죽어가게 되었다.

딸은 해산한지 며칠 지나서 이 소식을 듣고 무거운 몸으로 감옥을 찾았다.


마지막 가시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는 가녀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무엇이 더 이상 부끄러울까.

여인은 피골이 상접해 말라가는 아버지를 보고서 가슴을 풀었다.

그리고 흐르던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리고 말았다.


"노인과 여인"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었다.


동일한 그림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포르노'라고 비하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성화'라고 격찬하는 이도 있게 된다.

사람마다 해석이 분분한 탓이다.


만일 "노인과 여인"에 깃든 내력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비난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하게 된다.


사람들은 가끔 본질을 채 파악하지도 않고 비난의 화살부터 쏘아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본질을 알고나면 시각이 달라진다.


이처럼 교만과 아집 그리고 편견을 버려야만 세상이 보인다고 한다.

편견을 버려야한다. 그것도 될수록 일찍 말이다.

물론 아주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푸에르토리코 국립 미술관의 현관에 걸려 있다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제목의

윗 그림에 대한 감동적인 해설이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림에 숨은 진정한 의미를 파악해야 하듯이

일상사에서도 교만과 아집, 편견을 버리고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매우 교육적이고 일면 논리 정연한 내용이다.


그러나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가 어떤 곳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국립" 미술관이란 표현에 좀 이상스러움을 느꼈을 수도 있었으리라.


게다가 중남미의 푸에르토리코에서 그려졌다는 그림이 현대적이기는 커녕

중세 유럽의 르네상스 풍을 빼닮아야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 진상을 추적해 본다.

여기서 우선, 감옥에 갇혀 굶어죽게 된 아버지를 딸이 자기 젖을 먹여

살려 내었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맞는 이야기임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문제는 이 감동적인 얘기의 무대가 푸에르토리코가 아니라는데 있다.

이 이야기는 유감스럽게도 고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30년 경, 발레리우스 막시무스(Valerius Maximus)가 수사학 교재로 쓴

Facta et dicta memorabilia (기억할만한 공언과 격언에 관한 9권의 책)에 실려있는

인간의 덕목과 악의 본보기에 대해서 기술해 놓은 내용 중 일부분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Cimon, 아버지에게 젖을 먹인 딸의 이름은 Pero라고 한다.

딸의 이 숭고한 행동에 감동한 당국은 결국 아버지를 석방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그린 그림을 Caritas Romana 라고 부르는데,

고대 로마에서는 벽화로도 그려질 정도로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이 주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가 인간의

육체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던 르네상스 시대부터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그림이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연스러운 애정행각을 그린

3류 포르노 작품이 아닌 것은 이제 분명해진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관심" 에서 보듯, 이런 그림이 어느 정도의

에로틱한 면을 포함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니 이 그림을 보고서 에로틱한 상상을 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Caritas Romana를 보면서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투사라는 식의

황당한 '이념 과잉'의 왜곡된 해설이야 말로 더 큰 잘못이 아닐까.


따라서 "본질을 알면 시각이 달라진다." 라는 교훈은 이제

푸에르토리코의 국립 미술관 운운하는 엉터리 해설에 되돌려 주어야 할 것 같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벨기에의 동화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플랑드르(Flandre)의 화가 루벤스라고 한다.


이 작품이 바로 "시몬과 페로(Cimon and Pero)"라는 로마시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써 윗 그림은 1612년에, 그리고 아랫 그림은 1630년에 그린 것이다.


더군다나 이 그림은 현재 푸에르토리코의 국립미술관이 아니라 네델란드

암스텔담의 왕립박물관인 라이크스 뮤지움(Rijks museum)에 걸려있다.


진실된 이미지보다 더욱 진실처럼 들리는 이 조작된 이미지에

더 이상 흥분하고 조롱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참고 문헌
"로마의 감동" 혹은 "로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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