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삭전(東方朔傳)
한서(漢書)의 〈동방삭전(東方朔傳)>에 나오는 말이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BC 156∼BC 87)는 인재를 구한다는
소식을 천하에 공포하였다.
이에 제(齊)나라 사람인 동방삭은 대나무 한 짐에 글을 써서
무제에게 올렸다.
동방삭의 글은 내용이 많을 뿐만 아니라 필체도 당당하여
읽는 데 두 달이나 걸렸다.
동방삭은 해학과 변론에 뛰어났고, 속설에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 먹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장수하였다 하여
‘삼천갑자 동방삭’이라고 불렀다.
그의 해학과 재치는 언제나 무제를 즐겁게 해주어 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때로는 무제의 사치와 부국강병책에 대해
간언하는 등 결코 단순한 익살꾼은 아니었다.
다음의 일화도 있다. 삼복 더위에 무제가 신하에게 고기를
하사하였는데, 이를 나누어 줄 관리가 오지 않았다.
동방삭은 기다리다 못해 칼로 고기를 베어 가지고 갔다.
이 사실을 들은 무제는 동방삭을 불러 물었다.
동방삭은 "황제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베어간 것은 참으로
잘못입니다. 그러나 고기는 한 점밖에 베어 가지 않았으며
또한 그 고기는 아내에게 주었으니 인정 많은 처사가
아닌지요"라고 재치있게 대답하였다.
삼천갑자는 3000X60=180000년을 말하므로 동방삭은
18만 년을 산 셈이다.
삼천갑자 동방삭은 장수한 사람을 뜻한다.
서왕모는 중국 고대의 선녀로, 호치(虎齒)·표미(豹尾)의
신인(神人)이라고도 하며, 불사약(不死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동방삭의 일화.. 3천 갑자 동방삭은 장수하는 사람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그 동방삭이 어떻게 해서 3천갑자를
살 수 있었으며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동방삭이 젊었을 때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논에 물을 대는데 남의 논의 물까지도 제 논에다
댔는데, 이 논 임자가 하필이면 점을 잘 치는 장님의
논이었습니다. 이 점쟁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화가 날 밖에요, 그래 손을 꼽아 점을 쳐보니 동박삭이
죽을 날이 가까웠습니다.
이에 점쟁이는 혼자 중얼거리기를 "동방삭이란 놈
그냥 놓아 두자, 며칠 아니면 죽을 놈이니.."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 소리를 동방삭이 듣게 되었습니다.
약싹 빠른 동방삭은 당장에 점쟁이에게 극구 사과하면서
더 살 길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이에 점쟁이는 "어디 한번 점쳐 보자" 하고는 또 손을
꼽아 보고는 "사흘 후 야삼경에 어느 다리 밑에 밥
세그릇하고 짚신 세켤레하고 무명 석자 세치씩 끊어서
감발을 만들어 짚신 위에다 놓아 두고 숨어 있다가
행인 셋이 나타나거든 밥을 대접하고 짚신과 감발을
주어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방삭은 점쟁이가 일러준대로 준비해서 그날밤 그 다리
밑에 가 숨어있었습니다. 한밤 중이 되자 과연 행인 셋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리 중간 쯤에
오더니 다리 위에서 쉬면서 투덜대기를, "배도 고프고 짚신도
다 떨어지고 감발도 다 헤어졌으니 쉬었다나 가자."하면서
말 끝에 "얼마나 가면 동방삭이를 찾을까?"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행인 세 사람이 바로 자기를 찾고 있는 것이었죠.
동박삭은 점쟁이가 가르쳐 준대로 밥과 집신과 감발을 들고
나가서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행인 세 사람은 밥을 먹고 동방삭을 보고 "자넨 누구데
이렇게 우리한테 대접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동박삭은 "저는 재 넘어에 사는 동박삭이라는
사람인데 길 가는 사람이 배고파하면 밥을 주고 신이
떨어지면 신을 주곤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 행인은 동방삭이라는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이 일을
어쩌면 좋지?" 하며 숙덕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자네 밥까지 얻어 먹었으니
어쨌든 우리하고 함께 가자"하면서 동방삭을 데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실 이 세사람은 저승에서 동방삭을
잡으러 온 저승사자였습니다. 동방삭의 명이 다해 잡으러
왔던 것이죠.
그런 줄도 모르고 동방삭은 그들에게 끌려 갔습니다.
동방삭을 끌고 간 사자들은 동방삭에게 밥과 짚신과 감발을
얻은 은혜를생각해서 명부를 갖고 있는 판관이 잠 든 틈을 타서
동방삭의 이름 밑에30(三十)으로 된 것을 붓으로 삐침을 하나
그어넣으니 3천(三千)으로 고쳐 졌습니다.
이윽고 염라대왕이 동방삭을 재판할 때가 되었습니다.
대왕은 명부를 가져 오라 해서 명부를 보았죠. 그리고 동방삭의
명부 밑에 3천이라 써 있는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네 명이 3십이 아니고 3천이니 올 때가 아니다. 더 있다 오너라."
이래서 저승에 갔다 돌아 온 동방삭은 마음을 고쳐 먹고 착하게 살았고
삼천 갑자를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명이 다 되어
저승에 가게 되었는데, 워낙에 오래 살아서 신출귀몰해진터라
사자들이 동방삭을 알아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에 염라대왕은 꾀를 내어사자를 이승에 보내서 강물에서
돌에다가 검은 숯을 갈게 했습니다.
그때 동방삭이 거기를 지나가다가 숯을 돌에 갈고 있는 것을 보고
하도 이상해서 "어째서 돌에다 숯을 갈고 있는 거요?"
하고 물었죠.
그러자 사자는 "이 돌을 숯으로 갈아서 하얗게 하려고 갈고
있는 거요"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동방삭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무심히
내뱉었습니다. "허,이런,내 3천 갑자를 살았어도 돌을
희게 한다고 숯으로 가는 놈 처음보네 그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 네가 바로 동방삭이구나!"하고
그만 저승으로 잡아갔다고 합니다.
지금 서울의 한강 지류인 탄천(炭川)은 바로 동방삭을 잡으러 온
사자가 숯을 갈던 곳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속담에 부녀자들이 ‘살고 죽기는 시왕전(十王殿)에 달렸다.’고
하니 이는 명부를 잘 받들라는 명부전(冥府殿)에 관한 속담입니다.
명부사자(冥府使者)에게도 권한이 있어서 명부의 명을 받고
잡으러 왔다가 명부를 잘 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간곡한
사정을 들으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간답니다.
명부사자가 돌아가서 사실대로 명부전에 고하면 명부에서도
어쩔 수 없는가 보네요^^* 죽음의 질서로 인도하는 명부사자는
옛부터 셋이 옵니다. 그래서 초상이 나면 먼저 문 앞에 사자밥을
세 그릇 준비하는 것이죠^^
그러나 왕이나 지존의 인물은 일곱 사자가 와서 가마에 태워서
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두 삼신 사상과 칠성 신앙의 신교
문화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