走肖爲王
역사를 추론해 보건대 정치와 사회개혁은 단기적으로는 현실론자가 이기고 장기적으로는 이상 주의자가 이긴다고 했다. 역사에는 보수와 개혁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에 갈등이 있다.
역사는 느리지만 이상을 향해 달린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벽에 부딪쳐 좌절하는 정치드라마는 수없이 많지만 중종과 정암 조광조가 펼친16세기초 5년간의 정치 드라마는 아주 긴 여운을 후세에 남겨 놓았다.
정암 조광조는 중종 10년 (1515년)34세로 입문한 뒤 4년만인 38세에 감찰기관 최고책임자인 종이품 대사헌에 취임하는 파격적인 출세가도를 달렸다
17세때 무오사화로 평안도 회천에서 귀양살이하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운뒤 천마산, 성거산, 용문산등지에서 학문을 계속했다. 새벽닭이 울때 세수하고 머리빗고 숙연한 자세로 글을 읽어 사람들이 "미친사람" 또는 "재앙의 근원"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는 연산군이 두차례나 사화를 일으켜 깨끗한 선비들이 물러나고 백성의 원성이 높아 지는것을 보고 유교의 이상국가를 다시 세워야 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게 되었다고 한다.
정암이 25세 되던 1506년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유자광등이 구테타를 일으켜 연산을 쫓아내고 아우 중종을 왕위를 앉히자 정암을 비릇한 젊은 선비들의 기대는 크게 부풀어 올랐다.
중종집권 10년 공신들이 권력남용을 일삼고 구악못지 않은 신악을 휘드루자 선비들이 동요했다. 이에 중종은 정치의 물갈이를 시도 왕이 성균관을 직접 방문하여 과거를 치루는 알성시를 열어 젊을 유생들을 직접 발탁하고자 했다.
정암은 이 알성시에서 2등으로 발탁 34세로 젊은 왕 중종과 정치개혁의 파트너가 되었다. 정암은 알성시에 합격하여 언관이 되자마자 바로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등과 함께 공신들이 폐위시킨 왕비 신씨 복원운동을 벌였다.
정암의 왕도정치 개혁안은 군주(왕)독재 방지와 권력분산, 유교진흥과 불교, 도교등 이단 배척, 민심안정, 부정한 공신세력 축출이였다.
구체적인 정치개혁 안은 신하를 존대 실권을 대신들에게 넘기도록 하고 왕이 신하와 경전을 읽으면서 정책을 토론하는 경연을 열때 신하가 업드리지 않고 임금과 마주앉아 하도록 바꾸었고 현량과를 통해 28명의 젊은 선비들을 대거 영입 정치물갈이를 실현하고 유교진흥 시책으로 선현들 (정몽주, 김굉필, 성삼문, 박팽년등)이 충의를 위해 순절한 성현들을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 제사 지낼것 도교식 하늘제사를 관장하던 소격서를 폐지할것과 소학과 향약을 농촌에 보급해 삼강오륜을 세울것등이다.
민생을 위한 개혁으로는 곡물의 (토산품)공납 폐단을 시정하고 한전법을 실시하여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정했다.
중종14년 정국공신 176명중 76명의 작위를 취소하고 전체공신의 3/4을 작위를 박탈하자 홍경주, 남곤, 심정등 원로대신들이 후궁을 움직여 정암일파를 무고 했다. 대궐 나무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쓰고 벌레가 파먹게 꿀을 발라 왕에게 바치는등 왕과 정암을 이간시켰다.
중종14년 11월 정암과 그 추종자들를 체포해 정암을 전라도 능주(지금의순천)로 유배됐고 그해 12월 20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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