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자료/전설과 설화

에밀레종의 전설

도솔9812 2013. 6. 22. 09:13
 

 ◈에밀레종의 전설◈

 

어느 날, 신라의 제35대 경덕왕은 봉덕사에다 큰 종을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부왕이신 성덕 대왕을 기릴 수 있도록 신라에서 가장 큰 종을 만들도록 하시오. 그리고 종을 치면 그 여운이 멀리까지 퍼지도록 만들도록 하시오."

신하들은 종을 잘 만들기로 이름난 일전이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 일을 부탁했습니다. 일전은 공들여 종을 만들고

용이 구름을 타고 나는 무늬도 그려 넣었습니다.

드디어 종이 완성되자 경덕왕은 몸소 종을 보러 나왔고 봉덕사의 스님 한 분이 힘껏 종을 쳤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종에서 소리가 나질 않았습니다.
경덕왕이 직접 종을 쳐 보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래도 정성이 부족하여 부처님께서 노하신 것 같소. 그러니 경들은 다시 시주를 거두어서 더욱 정성을 들여

만들도록 하시오."

봉덕사의 스님들은 전국을 다니며 시주를 받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는 동안 경덕왕은 세상을 떴지만 종 만드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루는 봉덕사 주지 스님이 꿈 속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시주를 받으러 갔다가 그냥 돌아온 집의 아이를 데려오너라. 그 아이가 들어가야 되느니라."


 

잠에서 깬 주지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아이라면...... 시주할 게 아무것도 없다던 그 집 아이를 말하는

것이구나. 부처님의 뜻이니 서둘러야겠다.'
날이 밝자 스님은 그 집으로 찾아가서 꿈 얘기를 했습니다.

"스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을 끓는 물에 넣도록 둘 수 있겠습니까?"


 

 

 

 

아기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넋두리를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녀는 아기를 내놓고 말았습니다. 주지 스님이 데려온 아기는 펄펄 끓는 쇳물 속에 넣어지고 종은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이번에도 왕이 보는 앞에서 주지 스님은 힘껏 종을 쳤습니다.
그런데 맑은 종소리 속에서 '에밀레' 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섞여 나왔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아기가 자신의 어머니를 애타게 찾는 듯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이 종을 '에밀레종' 이라고 불렀습니다 .


 

 

 

 

에밀레종의 원래 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이야. 봉덕사 종이라고도 하지. 이 종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면서

세계적인 예술품이기도 하다.

국보 29호인 이 종은 신라 전성기의 최대의 걸작으로 혜공왕 6년(770년)에 완성되었으며, 높이 333㎝, 구경 227㎝,

둘레 709㎝이다.

이 종은 성덕대왕을 위하여 지은 봉덕사에 두었던 것인데 그 후 이 절이 수재를 만나 없어지자 영묘사에 옮겨졌으나

이 영묘사가 또 폐사되자 경주 남문 밖에 두고서 조석으로 치다가 경주박물관이 건립되자 이곳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전설의 사실 여부는 세인의 오랜 관심이었는데 아래 기사는 이 문제와 관련해 참고가 된다.
1200년 전 12만근의 구리로 빚어낸 신라인들의 염원이자 신의 소리인
성덕대왕신종은 고대 범종 역사를 새로 쓴

걸작이다. 

 

 

 

 

에밀레종의 조성 동기와 주종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을 새긴 종명에는 성덕대왕, 경덕왕, 혜공왕에 대한 찬사와

특이하게 혜공왕의 어머니인 만월부인에 대한 찬사가 두드러진다. 또 ‘원구’라는 인물의 권력이 강력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있다.

신종은 8살에 왕위에 오른 혜공왕이 15살 되던 해에 완성됐다. 당시 신라는 혜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하며

친정오빠인 김옹과 함께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종명에 나오는 원구는 혜공왕의 외삼촌인 김옹이다.

어린 혜공왕은 재위기간 내내 허수아비 왕으로 지내며 반란에 시달리다 김지정의 난 때 22살 젊은 나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종 만들기의 거듭되는 실패와 어린아이의 희생이라는 에밀레종 설화에 혜공왕, 만월부인, 김옹

사람을 대입하면 혜공왕대의 정치사와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를 부르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종소리에서 아련히 들려 일명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는 이 종에 정말

아이를 넣었을까?. 

성덕 대왕 신종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그런데 그 종에 얽힌 얘기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덕 대왕 신종에는 왜 이처럼 슬픈 전설이 담겨 있을까?
에밀레종의 전설 속에는 백성들의 고통이 숨겨져 있다.

통일 신라 시대의 백성들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큰 공사에 참여해야 했고, 또 집집마다 시주라는 이름으로

물건을 내놓아야 했으며 이야기에서 처럼 내놓을 것이 없을 땐 아기라도 내놓아야 할 정도였던 것이다.

성덕 대왕 신종이 만들어진 경덕왕과 혜공왕 시절은 나라가 안정된 때였다.
하지만 경덕왕 말기에 이르러 귀족들은 왕권에 반발하기 시작했으며 고민 끝에 경덕왕은 불교의 힘을 빌려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기에  석굴암, 불국사를 지었고, 또 성덕 대왕 신종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무게가 49만 근에 달했다는 황룡사 종이며, 당나라 황제가 감탄했다는 1만 개의 불상을 모신 만불상도 모두 경덕왕

때에 만들어졌다.
이렇게 겉만 보면 경덕왕 때는 신라의 문화 예술이 한창 꽃피던 시기였으며 당시 신라의 경주는 지붕을 전부 기와로

덮을 정도로 생활이 풍족했지만  이러한 부귀영화는 어디까지나 귀족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기에 일반 백성들의

삶은 오히려 너무나 비참했다. 

어쩌다 한 번 흉년이 들기라도 하면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을 팔거나 그도 안되면 꼼짝없이 굶어 죽어야 할 지경이되었다.
아버지가 굶어 오랫동안 굶주여 죽게 되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대접 했다는 이야기도 다 그때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에밀레종의 전설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직접 그 당시에 본 사람도 없고 보았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도 없고
문헌상의 정확한 기록도 없다.
어디까지나 전설은 전설일 뿐....진위여부는 알기가 힘이들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설을 유추해보면 종을 만드는 데 아기를 넣었다는 것이 어디까지나 백성들의 고통을 상징하고 있을

것이라는 설과 다른 편에서는 실제로 아기를 넣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이 국립경주박물관의 의뢰로 최근 실시 한 종 성분분석에 따르면 에밀레종에는 뼈의 주성분을

이루는 인이 검출되지 않았다.

 

 

 

 

포항산업과학연구원 신형기 박사는 13 일 "종 12군데에서 샘플을 채취, 분석시료 안에 1천만분의 1% 이상 들어있는

성분도 조사 가능한 '극미량원소분석기'로 분석 한 결과 인은 검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설처럼 어린아이 를 넣었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은 셈이다. 종의 85%는 구리였으며, 주석이 14%를 차지했다. 
신 박사는 그러나 이번 분석결과로 전설이 무조건 근거가 없다고 얘기해서는 곤란하다는 단서도 달았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남문인 징례문에 걸려있어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


어린 아기 하나에 들어 있는 인의 성분이 12만 근이나 되는 큰 종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사람의 비중이 구리보다 가벼워서, 사람을 넣었다면 위로 떠서 타기 때문에 '쇠찌꺼기'처럼 남는다.

만약 제작 당시 이것을 '불순물'로 봐 제거했다면, 인이 검출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학계는 어린아이를 집어넣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 대체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학자들은 그러나 "종을 만들기 위해 사람 을 집어 넣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시 신라인들이 '피나는' 노력을 들였다는 점, 그만큼 불심이 깊었다는 것을 반영한 것 아니겠느냐"는 반응이다.

아이를 집어 넣었든지 넣지안았든 하여간 신라인들의 대단한 집념과 의지의 산물이라고 볼수 있을것이다.

오히려 에밀레종 전설의 핵심은 종 자체의 소리와 제조 기법의 신비가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에밀레종의 복제품을 두 번이나 만든 적이 있지만, 에밀레종 원래의 그 신비하고

은은한 여운을 재현하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 로스앤젤레스 산 페드로에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 하기위해 우리나라가 1976년에 기증한 ‘우정의 종’이 한국식 보신각 건물과 함께 자리 잡고 있는데(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 배경으로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바로 이 종이 에밀레종을 그대로 본 따 만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서울의 종로 보신각에 걸려있는 종 역시 에밀레종을 그대로 재현하려 한 것이지만, 이 종들은 둘 다 에밀레종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신비한 소리를 전혀 들려주지

못하고 있다.

종소리가 갖는 주파수와 화음 등등 여러 가지 항목을 수치화하여 100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겨 보면 현재의

보신각종은 채 60점이 안 된다.

 

 

(에밀레종의 문양의 탁본 위에 심응섭선생의 글 )

하지만 에밀레종은 86점이 넘게 나온다. 이밖에 에밀레종과 마찬가지로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상원사 동종은 65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46톤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유명한 중국의 영락대종은 40점 대에 머무를 뿐이라는 것이다.

왜 에밀레종의 소리를 재현하는 일은 어려운가?
현대 과학은 합금의 성분비와 질량, 무게중심 등등 여러 가지 물리적 특성을 정확히 측정하고 계산해낼 수는 있지만

결국 그것을 그대로 복제해 내는 기술을 밝히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에밀레종에 바쳐진 20여 년의 세월과 아기 공양 전설까지 낳게 한 옛날 선인들의 정성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그대 들리는가
천년의 소리
겨레 가슴으로 빚어
세상을 깨우는
무궁한 역사의 메아리
자유와 정의와
사랑으로
인류평화를 위한
영원한 울림
동방의 소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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