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유전지대(油田地帶)가 있는 이어도는
명백한 우리땅
이어도 관할 해양영토 규모는 우리나라 면적의 몇 십배
“대한민국 최남단 영토는 이젠 마라도가 아니라 이어도(離於島)라야 합니다!”
이어도는 한국 최남단 마라도에서 149㎞ 떨어져 있다. 제주공항에서 헬기로 50여 분 거리다.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인도인 서산다오(蛇山島·287㎞)보다 가깝다.
바다 수면 밑 4.6m 아래에 있는데, 태풍이 와서 파도가 높게 칠 때 그 모습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실제로 존재하는 섬이다.
제주 사람들에게는 이런 실체가 확인되기 이전부터 이어도는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해온 이상향이다. 현실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자,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환상의 섬’이었다.
이어도는 제주도민의 이상향
‘이어도 사나 아아아~ 이어도 사나 으샤 으샤’.
물질하러 깊은 바다로 가기까지 힘겹게 노를 저어야 하는 해녀들의 노래다. 이 처럼 맷돌·방아노래, 타작 노래, 꼴 베는 노래 등 대부분 제주지역 노동요에 이어도(‘이여도’라고 부르기도 함)가 등장한다 이어도는 힘든 노동에 힘을 돋우는 후렴의 역할을 맡는 동시에 제주 사람들에게는 ‘꿈’이자 ‘이상향’이었다.
2012년 10월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이태경 기자 |
옛 제주사람들이 바람 많고 돌이 많은 땅에서 생활해 나가며 키워왔던 꿈, 해녀들이 물질을 하며 그리던 곳, 그곳이 바로 이어도이다.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과, 반대로 그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함께 만들어낸 이상향, 바로 이어도이다. 이어도는 제주지역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 민요 등에서 그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는 남편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는데 돌아올 줄을 몰랐다. 이 배는 풍랑을 만나 한 섬에 표류하게 됐다. 그 섬이 다름 아닌 이어도이다.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다 이어도로 떠났다는 전설도 있고, 그 남편을 그리며 이어도를 노래한다는 설도 있다. 설화 ‘남선비 이야기’도 비슷한 스토리로 흐른다. 곡식을 구하러 바다로 나간 아버지 ‘남선비’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일곱 아들과 아내가 뗏목을 만들어 그를 찾으러 나서고, 거친 파도에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결국 섬(이어도)에 표류해 있는 아버지를 찾는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신화와 전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제주도로부터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이어도에 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어도는 한결같이 꿈 속의 낙원 같은 살기 좋은 곳이자 떠나기 싫은 현실적인 생활의 터전으로 묘사되고 있다. 오래 전부터 해양활동을 해온 제주도민에게는 생활의 터전이자 현실의 고통을 치유해주는 이상향으로 함께해온 것이다. 구전되는 신화와 전설 속에서 이어도(離於島)의 어원을 찾을 수도 있다. 멀리 떨어진 ‘여’ 섬(암초)이라는 뜻을 담아 ‘이여도’로 부르고 표현했는데, 제주도 사람들에 의해 이어도란 말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도는 수심 40m를 기준으로 할 경우 남북으로 약 600m, 동서로 약 750m에 이른다. 정상부를 기준으로 남쪽과 동쪽은 급경사를, 북쪽과 서쪽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국립해양조사원 제공 |
고충석 (사)이어도연구소 이사장(전 제주대 총장)은 “제주도민들은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도 이어도 민요를 부르며 이어도란 이상의 섬을 꿈꾸었고, 그 이상향을 향한 동경속에서 현실의 고난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도는 최근에는 제주 출신 양종해 시인의 시 ‘떠나가는 배’, 고은 시인의 시 ‘이어도’, 이청준 소설 ‘이어도’ 등 현대문학을 통해 등장하기도 했다. 이청준은 이어도를 ‘긴긴 세월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서술했다. 문학작품 속의 이어도는 제주 사람들을 넘어 이상향을 동경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가서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51년 대한민국 영토로 첫 인정
그렇다면 이어도의 실체가 제주 사람들 마음 속에서 나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언제일까. 이어도는 우리 고문헌과 지도 속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700년대 초기의 ‘제주지도’, 1750년(영조26년) 쯤에 제작된 ‘해동지도 중 제주삼현도’, 1770년대의 ‘제주삼읍도총지도’, 1822년 ‘환영지중 탐라도’, 1841년 이원조가 제작된 ‘탐라지도병지’ 등의 지도와 ‘탐라순력도’ ‘남환박물’ ‘일본서기’ 등 고문헌에 ‘여인국’ ‘여도’ ‘제여도’ ‘유여도’ 등의 이름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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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는 ‘하멜표류기’에도 등장한다. 하멜은 1653년 7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무역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타고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도중 태풍을 만나 제주도 서귀포 인근 해안에 표착한 인물이다. 그가 제작한 동아시아 해역 항해도에는 이어도로 짐작되는 섬이 ‘Oost’라고 표기돼 있다. 이 지점을 보면 그 위치가 현재의 이어도와 일치한다.
국립해양조사원에 따르면 이어도가 국제적으로 다시 한번 조명된 것은 1900년 영국 상선인 소코트라(Socotra)호에 의해 발견되면서였다. 이 때부터 이 선박의 이름을 따서 ‘소코트라 암초(Socotra Rock)’로 부르기도 했다. 이후 1910년 영국 해군 측량선 워터 위치(Water Witch)호에 의해 확인됐다. 1938년에는 일제가 이어도에 직경 15m, 높이 35m 규모의 해저전선 중계시설과 등대시설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와 해양영토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기 시작하면서 자주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이어도에 대한 실재론이 등장한 것은 1951년 9월10일이다. 당시 국토규명사업을 벌이던 한국산악회와 해군이 공동으로 이어도 탐사에 나서 높은 파도 속에 실체를 드러낸 이어도 섬 꼭지점을 눈으로 확인했다. 당시 탐사팀은 ‘대한민국 영토, 이어도’라고 새긴 동판 표지를 수면 속 이어도에 가라앉히고 돌아왔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 당시 1952년 1월 18일 국무원 고시 제14호로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을 선언한 평화선 선포수역 내에 있어 우리나라의 해양관할권에 속했었다.
그 후 1984년 3월 ‘KBS-제주대 파랑도 탐사반’이 이어도에 대한 대대적인 해양탐사 작업을 진행해 이어도의 존재를 다시 확인했다. 1986년에는 수로국(현 국립해양조사원) 조사선에 의해 암초의 수심이 4.6m로 측량됐다. 이어도 최초의 구조물은 1987년 해운항만청(현 해양수산부)이 설치한 ‘이어도 등부표’(선박 항해에 위험한 곳임을 알리는 무인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항로 표지 부표)를 설치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공표했다. 1990년대 후반 ‘한·중 어업협정’ 체결 교섭과정에서 이어도 주변 수역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제주도가 이어도에 ‘제주인의 이상향(理想鄕) 이어도는 제주땅’라고 새긴 수중표석을 세우기도 했다.
이어도 주변은 황금어장
이어도가 최근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가 주변 해역이 연중 황금어장이라는 것이다. 북상하는 쿠로시오 해류와 남하하는 서해의 한류, 중국 대륙의 연안수가 서로 교차하는 곳이라 물고기의 먹이가 되는 플랑크톤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고등어, 조기, 민어, 갈치, 도미, 장어 등 우리나라 국민들이 즐겨먹는 생선 어류들의 서식처이자 산란장이다. 현재 우리나라 어선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어선들의 조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어도 관련 한중일 방공식별구역. |
무엇보다도 해양영토 이어도의 중요성과 미래가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독도는 동해라는 바다에 갇혀 있는 섬이지만 이어도는 태평양과 연결되는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의 중심에 있다. 따라서 이어도가 관할할 수 있는 해양영토의 규모는 우리나라 면적의 몇 십배가 된다.
이어도 주변 해역은 대한민국이 설정한 제4광구에 속한다. 이 곳에 원유매장추정량은 77억t으로 세계 3대 유전지대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천연가스와 원유 등 230여 종의 풍부한 해저 자원이 매장돼 있는 자원의 보물 창고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어도는 태풍의 길목에 위치해 있어 태풍을 실시간으로 파악해서 예보함으로써 얻어지는 돈은 수십조원에 이르며 이어도 항로는 한국의 해양인프라로 한국인들에게는 생명줄과도 같다.
첨단기술이 빚어낸 ‘인공 섬’ 종합해양과학기지
섬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항해한 배들과 바닷새가 고단한 생활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식처다. 또 근처에 육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어도가 바로 그런 곳이며 사람들의 희망을 모아 세운 것이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다.
이어도 과학기지는 드넓은 ‘우리 바다’의 한 가운데 솟아 있는 인공구조물(연면적 1320㎡, 높이 76m, 무게 3400t)이다. 이어도 정상으로부터 남쪽으로 700m 떨어진 수심 41m 지점에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해양과학기지다. 이어도 기지는 1995년 착공해 순수 우리 기술로 8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공됐다. 총 사업비 212억원, 7000여 명의 기술자들이 투입돼 2003년 6월 11일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도는 자동무인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해양과학기지가 세워지면서 신화와 첨단과학이 만나는 현실의 섬이 됐다. 이어도가 21세기 해양강국으로 가는 전초기지로 새롭게 탈바꿈한 것이다.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는 파도, 조석, 해류 등의 바닷물의 움직임을 비롯해 수온, 염분, 대기의 변화, 이산화탄소 등을 365일 자동으로 측정해 관측 자료를 무궁화위성을 통해 실시간 전송한다.
망망대해에 이어도 해양기지를 세우는 것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먼저 중국이 딴지를 걸어왔다. 이어도 해양기지 설치계획이 알려지면서 중국 정부가 해양기지를 문제 삼는 항의서를 보내왔다. 해양기지 프로젝트팀(기지 총괄연구 책임자 심재설 박사)은 국제법상 관례를 따르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밀어부쳤다. 당시 프로젝트팀은 이어도 해역이 우리 측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우리 배타적경제수역(EEZ)이나 대륙붕으로 간주될 수 있어 이어도 기지를 세우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어도 수중 표지석. |
해상 공사는 파도 높이가 1.5m 이하에서 진행되지만 이어도의 평균 파도는 3~4m였다. 2002년 10월 구조물을 설치하는 과정에 폭풍을 만났다. 구조물 운반선인 바지선이 폭풍에 휩쓸려 떠내려 갔다. 폭풍의 기세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고, 바지선 선장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폭풍이 물러가고 5일이 자났을 때 구조선이 바지선을 끌고 돌아왔다. 당시 바지선을 상하이 해상까지 떠내려갔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것이다. 또 100년 만에 기상 이변인 4월 태풍으로 작업중 철수하는 고충을 겪기도 했다.
“해양 주권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고충석 이사장은 “국제법상 이어도 해역이 우리 관할 바다라는 것은 명백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며 “과학적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정부가 외교적 협상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때 종합해양과학기지가 건설됐고, 연구원들이 1년에 90~100일 가량 상주하는 이어도에 주소를 부여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지난 2007년 가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해(海) 1번지’ 지번을 부여해 제주도 소관으로 귀속시키자는 제안이 있었다. 당시 이어도에 주소를 부여하는 방안에 대해 우리 정부는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도의회는 또 2007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이어도의 날’ 조례 제정을 추진했지만 무산됐다. 조례 내용은 제주 사람들로부터 구비전승되고 있는 이상향인 환상의 섬인 이어도의 날을 지정해 신화와 민요 등 창작 작품을 공연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제주도민의 자긍심을 높이자는 것이다. 이 역시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이 우려한 우리 정부가 반대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성재 이어도청년지킴이 회장은 중국의 일방적인 방공구역식별 선포와 관련해 “정부 차원의 강력한 대응과 함께 제주도의회에서 이번 회기 중 계류 중인 ‘이어도의 날 조례’를 통과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