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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이야기

도솔9812 2014. 4. 21. 11:21
 

 

훈민정음 해례본 이야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며 사람은 세모나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에 의해 1943년에 세상에 나오게 된다

 

 

간송은 10만석 부호가의 상속권자로 그의 재산으로 그는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그가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수장하던 1930∼40년대는 일제의 수탈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는데 문화재 감식에 뛰어난 오세창과 함께 모은 것이 '청자상감운학매병'(국보 68호)·'혜원전신첩'(국보 135호) 등 12점의 국보와 10점의 보물 등 다수의 문화재였다.그중 가장 눈여겨봐야할 것은 1943년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을 손에 넣던 이야기가 유명하다.
 

당시로선 존재 사실만 알려져 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북 안동에서 나왔는데 조선시대 이한걸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이 하사했다고 한다.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32.3센티미터 크기이고, 처음 두 장이 망실되었는데 연산군의 기훼제서율을 피하기 위한것이라 한다. 간송은 이한결이 선조가 하사받은 것을 훈민정음 해례본인줄 알면서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생활고 때문에 1000원으로 내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000원은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으로, 고서 가격치곤 비싸다는 주위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개한 이에게 사례로 1000원, 해례본 값으로 1만원을 쳐 주며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런 연유로 좋은 문화재가 나오면 상인들은 간송에게 제일 먼저 보였다 한다. 간송이 해례본을 세상에 내놓기 전까진 그 누구도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알지 못했다. 창제시 “고전(古篆, 옛글)을 모방했다.”는 말에 따라 여러 학설이 있었는데 인도 구자라트 문자나 산스크리스트어, 몽골의 파스파문자, 갑골문자를 모방했다는 설부터 문고리나 창살모양을 본 땄다는 설까지 분분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한글이 천지인 삼재(三才)의 원리와 태극, 음양오행의 원리를 담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후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에겐 지켜야할 목표로서 6‧25 전쟁 당시에도 오직 이 책 한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게삼아 잤다고 한다.

간송의 이런 행적과는 반대로 지난 2008년 7월 배모씨가 "집을 수리하던 중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발견했다"고 공개하면서 복마전이 시작됐다. 상주본은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보존 상태가 좋아, 전문가들이 "가치가 1조원도 넘을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경북 상주에서 발견됐다고 해 '상주본'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간송이 발견한 간송본에 비해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는데도 그 가치가 1조원이 넘을 것이라니 실로 엄청난 가격이다. 그런데 경북 상주시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던 조모(67)씨가 "2008년 7월 배모씨가 가게에서 고서적 2박스를 30만원에 사가면서 해례본을 몰래 끼워넣어 훔쳐갔다"며 배모씨를 고발하고, 물품 인도 청구소송을 내는 일이 벌어진다..  이를 대법원에서 조씨 소유권을 인정했고, 이 과정에서 이 해례본이 지난 1999년 문화재 절도범 서모(51)씨가 경북 안동시 광흥사에서 훔쳐 조씨에게 팔아넘긴 장물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배씨는 재판 과정에서 굳게 입을 다물고 1심에서 징역 10년이 선고되는 것도 감수한 채 해례본 행방을 감춰왔다. 한편 장물 취득 장물아비인 조씨는 "해례본을 찾는 대로 국가에 기증하겠다"고 기증식까지 가졌다 복마전도 이런 복마전이 없다. 한편 배모씨는 상주본을 땅에 묻었다고 하는데 고서가 훼손되기라도 한다면 실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복마전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창제원릴를 살펴 보도록 하겠다. 훈민정음 해례본 (訓民正音解例本)은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부르며,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고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내용은 “國之語音異乎中國(나라말 소리가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세종의 어제 서문과 본문에 해당하는 〈예의(例義)〉및 〈해례(解例)〉, 그리고 정인지가 쓴 〈서(序)〉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임금의 백성사랑과 우주의 이치를 담다.

1943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간송 전형필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알지 못했다. 창제시 “고전(古篆, 옛글)을 모방했다.”는 말에 따라 여러 학설이 있었는데 인도 구자라트 문자나 산스크리스트어, 몽골의 파스파문자, 갑골문자를 모방했다는 설부터 문고리나 창살모양을 본 땄다는 설까지 분분했다.


물론 해례본에서는 옛 글자들에서 일부 글자는 모양을 따왔다는 내용도 있지만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며 사람은 세모나다. 는 천지인의 원리를 그 근본으로 하고있는 것이 밝혀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한글이 천지인 삼재(三才)의 원리와 태극, 음양오행의 원리를 담고 있음이 밝혀졌다.
 

첫음(자음)이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 떴으며 가운데 소리(모음)는 하늘‧땅‧사람을 뜻하는 천지인을 바탕으로 했다. 점 하나와 선 2개로 모든 모음을 표시했다. 가장 간단한 것으로 매우 복잡한 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가히 천재적인 업적이라 평가할 만하다.


<세종실록> 세종28년(1446) 9월 29일자에 나타난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을 보면 세종임금이 백성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했고 “바람소리, 학의 울음, 닭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 가 있다”고 하였다.
 

한글의 우수성이기도 하지만 백성이 막힘없이 쓸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그대로 베어 나온다. 또한 훈민정음으로써 송사(訟事)를 판단하게 하여 각종 행정조치나 형벌에서 글을 몰라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하려 했다. 집현전 학자 여덟 명에게 새로 만든 목적과 원리 그리고 글꼴을 결합하여 표기한 방법을 설명하는 해례본을 지은 이유도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대에 문자를 새로 만들고 이를 쓸 가난한 백성의 사정까지 두루 살펴 편이하게 하려는 노력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어떤 덕성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준다. 참으로 자랑스로운 우리민족의 역사요 우리의 글이다. [DDP(동대문 디자인 프라자)에서 9월까지  간송 문화전에 혜례본 원본이 출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