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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속에도 유대인들이 있었다

도솔9812 2019. 9. 18. 20:32




한국 역사 속에도 유대인들이 있었다


한국 역사 속의 유대인이라 하면 아직도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요, 우리는 오랫동안 단군배달 자손이란 신화를 문자 그대로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한국사회도 다문화사회로 변했고, 우리의 역사도 동서문명의 교류 속에서 ‘잡스런 인종’의 유입도 있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아시아대륙의 첨단에서 이른바 잡종교배가 이뤄졌기 때문에 우수한 한민족으로 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이라면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여러 국가에서 배척되고 수난을 받은 특수민족이고, 그래서 그들은 세계로 흩어져 디아스포라(diaspora)로 연명해왔다. 그럼에도 문화의 전승자 역할을 했고, 당해 국가 권력의 억압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경제력을 확보하려 했고, 노벨상과 미국 정치 경제 문화계를 석권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해외의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제2의 유대인’이니 디아스포라라고 즐겨 부르고 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 상해임정 건물이 있던 곳은 프랑스 조차지로 유대인들의 게토였다. 유대인들도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시오니즘(Zionism)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중이어서 심정적으로 한국인들과 공감하는 바가 컸다.

 

한국인이 유대인과 교류한 적이 있었나?

 

그런데도 한국의 학자들 가운데 한국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자가 거의 없다시피하여 한국은 유대인과 무관한 나라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에 가보면 일본이 유대인의 은인국처럼 비쳐지고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듣기조차 힘들다. 그것은 전적으로 한국인 학자들의 연구 부족 때문이다. 오늘날은 가만히 있어도 뒤집어쓰는 세상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멸망 후 유대인들은 서양으로만 흩어진 것이 아니라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로도 흘러왔다. 중국의 카이펑(開封)에는 유대인 회당과 집단이 거주했고, 당나라와 교섭이 잦았던 신라에도 유대인들이 온 흔적이 있다. 학계에는 신라에 페르시아인, 아랍인들이 와서 살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페르시안 유대인, 아라비안 유대인들도 있었다.

 

종교학자 클라크(Allen Clark)는 석굴암의 12나한상의 하나는 유대인 코(Jewish nose)를 가졌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불교전래사에는 상당수 인도 유대인, 즉 검은 유대인(black Jew) 혹은 ‘부쥬’(buddhist Jew)라 불린 불교유대인이 신라와 백제에 왔을 것으로 보인다.

 

마라난타니 묵호자(墨胡子)가 그럴 것이다. 영주 분처상은 도마(Doma)라는 히브리어와 함께 지금도 서 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쌍화점이니 회회아비니 하는 서역인의 왕래가 활발했다.

 

조선실록에 따르면 세종 4년까지만 해도 ‘색목인(色目人)’들이 자기들의 고유한 의상을 입고 집단을 이뤄 살고 있었다. 이들이 배가 고파 인가에 내려와 도둑질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조정에서 이들을 한국인 복장을 입혀 동화시키기로 논의했다.

 

이것은 결코 ‘유대인 박해’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조선조에서는 유교 양반중심의 사회로 변화하면서 유대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으로 흩어져갔다. 일본에 유대인이 많은 이유이다.

 

한국 근현대사 속의 유대인

 

남은 유대인들은 백정이나 사당패 혹은 기생 같은 하층민으로 서식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려면 유학중심의 통치사적 정사(正史) 밖에 기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역사학 방법도 고고학과 인류학 등 학제적 연구로 다양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척박한 사료의 한국사회사와 문화사도 상당히 진척될 수 있다. 최근에도 경주에서 페르시아인 토우(土偶)가 발굴되었고,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인 신라 수도의 국제성이 더 부각되고 있다.

 

여기에 문화전승자로서의 유대인에 대한 조명도 활기를 띠고 있다. 김수로왕과 혼인한 인도 공주 허황옥도 쌍어(雙魚) 문양 등으로 보아 검은 유대인일지도 모른다. 아리랑도 페르시안 집시들의 노래가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유대인 연구는 고대나 중세 얘기에 호기심이 기울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실상 우리 역사에서 진지한 관심을 둬야 할 것은 근현대사에서의 유대인의 도래와 역할에 관해서이다. 광화문의 프레스센터 1층 로비에 유대인의 동상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구한말 <대한매일신문>을 발간한 베텔(E.T.Bethell,  裵說, 1872-1909)은 영국계 유대인이었다.

 

이처럼 이름을 알 수 있는 유대인이 한국에 얼마나 왔을까? 그들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1628년에 화란인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 1595-?)가 경주 앞바다에 표류되어 조선에 억류되어 이름을 박연(朴燕)으로 갈고 한국 여성과 결혼해 아들, 딸 하나씩을 낳고 한국에서 죽었다.

 

이들의 후손이 어떻게 되었을까? 27년 뒤 1653년에 또 다른 화란인 하멜(Hendrik Hamel) 일행 36명이 제주도에 표류해 13년간 조선에 살다가 1666년에 하멜과 7명이 일본으로 탈출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들 36명 중 유대인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높은데, 그렇다면 그들이 한국에서 죽은 근세의 유대인들이라 하겠다. 이들 중 한국 여성과 결혼한 사람이 있었는지, 그 후손은 어떤지 궁금하다.

 

쇄국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전하려 노력한 최초의 인물은 독일계 유대인 구츨라프(Karl Gutzlaff, 1803-51) 목사였다. 1860년대에 유대계 독일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2)는 조선 해안을 탐사하고 돌아가 <금단의 나라 조선>을 저술했고, 1895년 러시아계 유대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는 일본을 거쳐 조선에 와서 살면서 최초로 구약성서 시편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1904년 거문도에서 발발한 러일전쟁은 일본이 서양세력에 승리하는 최초의 전쟁이었고, 그 기세로 한국을 병합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러한 치명적인 전쟁이 어찌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는지 누구보다 한국인은 심각하게 알아야 한다.

 

실인즉 유대인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러일전쟁의 발발이 알려지자 미국과 유럽으로 탈출한 유대인들은 ‘포그롬’(Pogrom)으로 혹독한 박해를 가한 ‘악의 화신’ 러시아제국이 멸망할 때가 왔다고 환호하며 일본을 전폭 지원했다.

 

미국 애틀란타에 사는 유대인 은행가 야콥 쉬프(Jacob H. Schiff, 1847-1920)는 대대적 모금운동을 벌여 일본에 군함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일본 정부에 초청되어 최고훈장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 길로 조선을 방문해 황실로부터 미국의 부호라고 국빈 대우를 받기까지 했다.

 

유대계 미국인 타운젠트(Walter D. Townsend, 陀雲仙, 1856-1918)는  조선인에 대한 각종 대금업(貸金業)에 열중했다. 그는 미국 스탠더드 석유회사로부터 매년 100만 갤런을 수입하고, 일본에 한국쌀을 수출하는 무역을 하여 유대인의 능력을 보였다. 자본이 부족했던 조선 상인들은 가옥문서나 전답문서를 저당 잡히고 심지어 조선 정부도 돈을 빌렸다. 현재 인천외국인묘지에 묻혀 있다.

 

1917년 러시아제국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자 반대하는 백계러시아인(white Russian)들이 대거 만주와 조선으로 탈출했다. 만주에 살던 이들은 교육을 위해 조선의 평양으로 자식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서울에서 태어난 노인들은 백계 러시아인들이 버터와 화장품을 팔러다니던 기억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이라 여겨지는데, 대개 일본이나 상하이, 아니면 미국으로 간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은 배타적 사회일 뿐 아니라 일본의 지배 아래 있는 식민지 조선에 머물 미련이 없었을 것이다.

 

▲ 구한말 <대한매일신문>을 발간한 베텔(E.T.Bethell, 裵說, 1872-1909)은 영국계 유대인 이었다./ 사진출처 : 베텔선생기념사업회 블로그

 

상해임시정부와 유대인들의 지원

 

1919년 3·1운동이 좌절되자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이전에 연해주에도 있었으나 유대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국제도시 상하이로 통합했다. 임시정부 건물이 있는 곳은 프랑스 조차지로 유대인들의 게토였다.

 

그래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유대인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컸다. 유대인들도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시오니즘(Zionism)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중이어서 심정적으로 한국인들과 공감하는 바가 컸다. 들여다볼수록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과 유대인들의 접촉이 드러나고 있다.

 

상하이에 있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1918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관심을 갖고 파리 평화회의에 김규식 일행을 파견했다. 그러나 뜻대로 독립운동이 진행되지 못하는 사이 본국에서는 3·1만세사건이 터지고 일본 통치자들에 의해 많은 압박이 가해졌다.

 

여운형과 이광수는 우선 이런 피해 사실을 정확히 파악해 세계 언론에 알리고자 당시 China Press 특파원 자격으로 페퍼(Nathaniel Peffer, 裴斐, 1890-1964)라는 기자를 한국으로 보내 취재하게 했다. 페퍼는 한국에서 캐나다인 스코필드(Frank Schofield) 박사의 도움을 받으며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자세히 취재하고 많은 사진자료를 갖고 왔다.

 

상하이의 시오니즘 연합회(Shanghai Zionist Association)를 창립하는 데 유대인 법률가 로빙기어(Charles Lobingier)가 주도적 역할을 했는데 후일 한국이 해방되고 미군정이 실시될 때 미군정 법률고문으로 한국에 와서 살았다.

 

유대계 체코인 마사리크(Thomas Masaryk), 가이다(Radola Gajda), 한취(Josef Hanc) 같은 인사들이 이끄는 체코 임시정부단(Czechoslovak Legion)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도와줬다.

 

후일 대통령까지 된 마사리크는 1918년 러시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를 횡단해 일본을 경유 미국으로 가서 윌슨 대통령을 만나고 이승만과도 교섭했다. 독일에서는 한국인 작가 이미륵(1899-1950)이 유대인 출신 후버(Kurt Huber) 교수와 특별한 교분을 가졌다.

 

1945년 해방 직후부터 정부 수립까지 3년간 실시된 미군정기는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한국에 살기 시작한 때이다. 물론 일본이나 상하이 같이 큰 무리로 몰려올 곳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동양의 경험이 있거나 특별한 관심이 있는 유대인들은 자원해 한국에 와서 살았다.

 

미군정의 총책임자인 하지(John Hodge, 1893-1963) 장군이 유대인이었고, 법률고문들은 대부분 유대인 출신이었다. 로빙기어(Charles Lobingier, 1866-1956) 외에 페르글러(Charles Pergler, 1882-1954)는 체코의 독립운동사에 오르는 인물이다.

 

프랭켈(Ernst Fraenkel, 1898-1975)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법을 배우고 미군정 법률고문으로 내한해 활동하면서 서울법대에서 국제법을 강의하기도 했다.

일본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 있으면서 일본의 법개혁에 참여한, 예컨대 오플러(Alfred Oppler), 케이드(Charles Kades) 같은 유대인 법률가들도 한국을 방문하거나 주한 동료들과 교섭을 했다.

6·25 전쟁과 유대인

 

한국전쟁에 많은 미군과 유엔군이 참가하면서 한국 땅에 유대인의 숫자는 급증했다. 어떤 학자는 한국전쟁에 3만 명의 유대인이 참가했다고 한다. 로젠(Milton Rosen, 1906-76)은 군종 랍비로서 한국전의 실황을 생생히 뉴욕의 유대인신문(Jewish Chronicle)에 10회 연재했다.

 

후일 그의 아들이 편집해 <한국의 미국인 랍비>(An American Rabbi in Korea)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작가로 유명한  포톡(Haim Potok, 1929-2002) 역시 군종 랍비로서 한국전을 체험하고 <나는 한줌의 흙>(I am the Clay) 등 소설을 남겼다. 이른바 GI유대인(GI Jews)은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할 테마이다.

 

1962년 이스라엘과 외교관계가 개통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키부츠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유태영 등 학자들이 이를 연구하러 이스라엘에 유학했다. 1964년 서울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설립되었고, 1969년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 한국 대사관이 설립되었다.

 

1978년 이스라엘의 모셰 다얀 정부는 예산 절감으로 서울의 대사관을 철수하고, 주일본대사를 겸임하게 했다. 이 때(1985-88)의 대사 코엔(Jaacov Cohen) 박사는 한국에 대한 연구가로서 수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현재 히브리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스라엘 대사관이 설치되고 국제적으로 이름 있는 유대인 사업가들의 연락사무소가 생겨나고 이스라엘 기업인들이 한국의 기간산업에 참여했다. 아이젠버그(Shaul Eisenberg, 1921-77)는 독일 뮌헨 출신으로 일본에서 일본 부인을 얻어 미국으로부터 철강을 수입, 성공해 한일회담 후 한국에도 진출해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불행하게 북경에서 죽었다.

 

프리덴탈(Richard Friedentahl, 1896-1979)은 영국에 사는 유대인으로 괴테 전기가로 유명한데, 1957년 일본에서의 국제펜클럽대회에 독일 측 부회장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미륵 박사의 가족을 만나고 돌아가 방한기를 남겼다.

 

아미르(N.A. Amir)라는 이스라엘인이 우리나라 노동청의 고문관으로 1978년부터 1981년까지 근무했다. 3년 반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이론으로보다도 산업의 현장을 다니면서 안전에 관한 현장 지도를 많이 해줬다.

 

▲ 인천상륙작전 당시 상륙지휘함선에서 하지 중장으로부터 상륙전 전황설명을 듣고있는 맥아더 장군(오른쪽 하지중장) / VOA

 

유대인 교류 연구에 새로운 관심 가져야

 

현재 한국에는 약 200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미군 병사가 많으며, 한국인과 결혼한 유대인 가정도 늘어가고 있다. 로젠베르그(Rosenberg) 씨는 한국 여성과 결혼해 40년 이상 한국에 살고 있으며, 한국인-유대인이 결혼한 30여 가정이 한국에 살고 있다. 용산의 미8군에서는 매주 금요일 유대식 예배가 거행되고 있다. 미국에도 한-유가정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제한된 지면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상술할 수 없고, 중요한 두 증언으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뮈텔( Gustave Mutel, 閔德孝, 1854-1933) 대주교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한국 천주교의 수장으로 살았는데,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한국인이 유대인과 여러 면으로 유사한 점을 지적했다.

 

<뮈텔일기>를 읽어볼 만하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유기천 박사(1915-98)는 유대인 부인 실빙(Helen Silving, 1906-93)과 결혼했는데, 이 세계적 법학자는 한국인은 어쩌면 이스라엘의 사라진 열 지파(lost ten tribe of Israel)의 하나일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본고는 완성된 연구 결과가 아니고 거대한 연구 과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취지문정도이다. 제2의 유대인을 표방하는 한국인들이 그것의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한다면 자기 모순일 뿐 아니라, 한국은 유대인과 무관한 나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한국인을 위해서 손해이다.

 

노벨상을 포함해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계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유대인들이 한국인과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져왔다는 진실을 이제라도 조명하고 알려야 한다. 필자도 이런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 연구는 한 사람만이 아니고 국민적 관심을 가질 과제라 생각한다.

▲ 서울대 법대 졸업 /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법학 박사 / 한국인물전기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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