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역사속의 인물탐방(매헌 윤봉길의사) 2013.1.6/죽암 장석대
양재 시민의 숲역
어머니에게 작별하는 윤봉길. 윤의사가 상해를 향하여 출향하기 전날인 3월5일 시량리동네 한 길가 느티나무 아래 종형 상점 앞에서 친정나들이 가시는 어머님께 "어머니 갈미에 잘다녀오시라"고 하면서 수건과 과자를 사드리고 작별하였다.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그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
※ 윤봉길의사가 조국독립에 몸을 바칠 뜻을 세우고 집을 떠나가면서 남긴 글
宣誓文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하기 爲하야 韓人愛國團의 一員이 되야 中國을 侵略하는 敵의 將校를 屠戮하기로 盟誓하나이다. 大韓民國十四年四月二十六日 宣誓人 尹奉吉 韓人愛國團 앞
왼쪽 시계는 2원짜리 김구선생의 시계이고. 오른쪽 시계는 6원짜리 윤봉길의 시계.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 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백범일지에서..>
황포강(黃浦江)북쪽이 잿더미로 변하매 십만의 침략군은 피를 물고 돌아가더라. 철통같은 진지도 한 선비를 막지 못해 조용히 괴수들을 섬멸했도다.
형장에서
검찰관 네모도 소타로가 사형을 집행한다는 내용을 고(告)하고 유언을 묻자, 윤봉길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미 사형을 각오한 것이니 지금은 아무것도 할말이 없다"고 일본어로 명료히 말했다. 형장에서 형집행과정을 기록하는 일본군인 다찌무라 구베는 이 순간 범인(윤봉길의사)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여 육군대신에게 고했다.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세고 침착하였다."
o 표 윤봉길의 유해가 묻혀있던 장소. 이곳은 쓰레기하치장 옆 통로였다.
일제는 사형집행 후 곧바로 윤봉길의사의 사체를 남쪽을 약 3km 떨어진 가나자와시 공동묘지북쪽 모퉁이에 알지 못하게 평장(平葬)하였다. 일제는 윤봉길의사의 유해가 발굴될 때까지 13년간 짓발고 다니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 사진저장/유명공원방-IMG_0183~IMG_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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