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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인물탐방(매헌 윤봉길의사)

도솔9812 2013. 2. 20. 21:40

                 

                                                                 (16)역사속의 인물탐방(매헌 윤봉길의사)

                                                         2013.1.6/죽암 장석대  

 

 
민족의 영웅 매헌 윤봉길의사
 
매헌 윤봉길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광현당에서
파평윤씨 윤황공과 김원상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 이고 아호는 매헌이요, 봉길은 별명이다.
매헌 윤봉길의사께서는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나라잃은 백성들의 설움과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각곡독서회, 수암체육회, 축산장려회, 효실천위친계, 월진회 등을 조직하여 농촌부흥운동을 주로
하신 새마을운동의 큰 뿌리 중의 한 분이시다.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부흥원을 건립하여 야학, 강연회, 학예회, 체육대회 등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나라 살리기 운동에 앞장서신 농민운동가요,
문필가 이면서도 행동하는 사상가, 실천하는 선구자 이셨다.

 

 

양재 시민의 숲역

 

 

 

 

   

 

        23세때인 1930년 3월 농촌부흥운동의 한계를 느낀 윤의사께서는 독립운동에 몸을 바쳐야겠다는

        큰 뜻을 품고「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기고 고향산천, 부모형제,

        처자식까지도 뒤로 한 체,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압록강을 건너 이역만리 상해 임시정부를

        향해 망명길을 떠나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제 침략자 수뇌들을 정의의 폭탄 한 방으로 통쾌

        하게 응진함으로써 그 큰 뜻을 이루었다.

 

 

 

 

 

 

 

어머니에게 작별하는 윤봉길.

윤의사가 상해를 향하여 출향하기 전날인 3월5일 시량리동네 한 길가 느티나무 아래 종형 상점 앞에서 친정나들이 가시는

어머님께 "어머니 갈미에 잘다녀오시라"고 하면서 수건과 과자를 사드리고 작별하였다.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그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

 

※ 윤봉길의사가 조국독립에 몸을 바칠 뜻을 세우고 집을 떠나가면서 남긴 글

 

 

 

 

宣誓文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하기 爲하야 韓人愛國團의

一員이 되야 中國을 侵略하는 敵의

將校를 屠戮하기로 盟誓하나이다.

大韓民國十四年四月二十六日 宣誓人 尹奉吉

韓人愛國團 앞

 

 

왼쪽 시계는 2원짜리 김구선생의 시계이고.

오른쪽 시계는 6원짜리 윤봉길의 시계.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 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백범일지에서..>

 

 

 

 

황포강(黃浦江)북쪽이 잿더미로 변하매 십만의 침략군은 피를 물고 돌아가더라.

철통같은 진지도 한 선비를 막지 못해 조용히 괴수들을 섬멸했도다.

 

 

 

형장에서

 

검찰관 네모도 소타로가 사형을 집행한다는 내용을 고(告)하고 유언을 묻자,

윤봉길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미 사형을 각오한 것이니 지금은 아무것도 할말이 없다"고 일본어로 명료히 말했다.

형장에서 형집행과정을 기록하는 일본군인 다찌무라 구베는 이 순간 범인(윤봉길의사)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여 육군대신에게 고했다.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세고 침착하였다."

 

o 표 윤봉길의 유해가 묻혀있던 장소.

이곳은 쓰레기하치장 옆 통로였다.

 

일제는 사형집행 후 곧바로 윤봉길의사의 사체를 남쪽을 약 3km 떨어진 가나자와시

 공동묘지북쪽 모퉁이에 알지 못하게 평장(平葬)하였다.

일제는 윤봉길의사의 유해가 발굴될 때까지 13년간 짓발고 다니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25살의 젊은이 매헌 윤봉길이 상하이로 망명, 김구선생을 찾아와 자신의 살신의지를 밝혔다.

매일 매일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결국 실패로 끝난 이봉창의거의 마지막 의지를 대신

하겠다고 했다. 스스로 작성한 선언문을 목에 걸고 김구선생과 함께 마지막 모습을 기념 촬영하고나서 초개처럼

목숨을 버릴 수 있었던 그 의연함과 맹세는 가히 대장부의 기백이요 천하영웅의 기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한인애국단의 치밀한 전략이 아니었다면 성사할 수 없었던 매헌 윤봉길의거는 세력전쟁으로 승승장구하던 제국주의

일본을 질타하는 중국의 장개석은 물론 세계나라들이 자주적 독립을 하겠다는 피의 혈투에 감동하고 응원을 보냈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아무리 어려운 처지이지만 강인하게 추진되고 있음을 똑바로 실증한 증거였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새 물꼬는 매헌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벌어졌던 상해사변 경축 장절

수라장에서 확실한 기세를 휘어 잡았다.

                    ☆ 사진저장/유명공원방-IMG_0183~IMG_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