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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도솔9812 2013. 8. 1. 11:42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덕수궁이 시끄럽다. 작년 봄 덕수궁 돌담에 진치고 있는 시위대의 천막이 너무 지저분하다고 누가 불을 질러 덕수궁 담장 서까레까지 그을리게 하더니 일년이 지난 지금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시위가 그치지 않는다. 1999년 서울시가 '걷고 싶은 길' 1호로 지정한 덕수궁 앞은 무허가 시위로 '무질서 특별구'가 되었다. 오늘부터는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야당이 천막을 치고 장외정치투쟁을 한다고 한다.

 

 

 

서울에는 5대 고궁이 있지만 접근성의 용이로 덕수궁만큼 시민들과 외국관광객의 발길이 잦은 곳도 없을 것이다. 벚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같은 가로수들이 계절 따라 꽃과 신록 그리고 낙엽을 선사한다.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면 중화전 앞뜰은 서울 도심 한가운데라 믿기지 않을 만큼 고즈넉하다.

 

사람들은 그 돌담길을 걸으며 제 마다의 기억을 더듬어 옛 추억을 회상한다. 어떤 이는 미소를 짓는가 하면 어떤 이는 떠 올리고 싶지 않은 상처에 괴로워 한다.

 

 

 

고궁은 서울을 빛내는 보석이다. 시간의 거친 숨결에서 잠시 비껴 나 있는 곳이고 悠長하게 흐르는 역사의 현장이다. 고궁은 5백년에 걸친 27명의 왕과 그의 수 많은 부인들과 자녀 그리고 그 신료들과 말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곳, 자연의 법칙과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체감할 수 있는 곳이다.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거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정동길, 추억과 사랑과 로맨스가 점멸하는 덕수궁 돌담길 주변에는 수 많은 역사가 잠자고 있다.

 

 

한말 격동기의 9개국 대사관, 1928년에 지어진 경성재판소, 개신교 최초의 정동제일교회, 당시 신교육을 대표하는 이화화당과 배재학당 등 역사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아주 많다.

 

 

갑자기 길옥윤 작사 작곡, 혜은이 노래의 <옛 사랑의 돌담길>이 생각난다.

 

덕수궁 돌담길 옛 날의 돌담길
너와 나의 처음 만난 아카시아 피던 길
정동교의 종소리 은은하게 울리며는
가슴이 뭉클해졌어 눈시울이 뜨거웠어
아아 지금은 사라진 정다웠던 그 사람이여

 

 

 

이와 같이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들의 낭만의 길이었지만, 이 돌담길에 얽힌 징크스도 있었다. '연인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라는 속설인데 이 속설은 돌담길을 걷다보면 가정법원이 있는데 그곳에는 이혼하기 위해 오는 사람과 이혼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생긴 말이었다.


 

그러나 가정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사간 뒤에는 이런 우숫개 소리는 사라지고 이 돌담길은

여전히 연인들에게 뿌리치지 못할 데이트 코스로 남아 있다. 호주머니 사정이 가벼웠던

60~70대의 청춘 시절, 시청 근방에서 짜장면이나 순두부찌개로 저녁을 떼우고 돌담길을 걷다 보면 어느듯 덕수궁에 들어가게 되고 부지부식간에 뒷 켠의 숲속을 찾아 들게 되어 드디어 결혼까지 골인한 친구도 있었다.


 

덕수궁은 조선 5대 궁궐 중 가장 규모가 작은 것으로,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는데 선조가 임진왜란 직후 궁궐이 모두 불타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行宮이 되었다.


 

그 뒤 오랫동안 빈 궁궐로 되었다가 1896년 아관파천으로 왕태후와 왕태자비가 이 곳으로 옮겨와 생활하였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건물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었으나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이 곳에 살면서 순종이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나라가 망해 가는 와중에도 1897. 8. 15 조선이 더 이상 청나라의 속국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여 임금의 칭호를 중국과 같이 황제로 격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도 독자적을 광무라 하였다. 중국의 황제와 일본의 천황과 같은 반열에 올려 놓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명칭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500년간 세자를 책봉할 때도 중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일년에 두번씩 조공을 바치는 등 속국의 신세를 면치 못했는데 이런 자주독립국가를 만방에 선포한 것은 국제 정세상 청나라는 이미 망한 것과 다름이 없었고 일본은 명성왕후를 살해한 부담으로 이를 방관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고작 왕의 호칭과 국호나 바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단 말인가.

궁궐의 정문 현판도 가운데에 '化'를 넣지 않고 대한문이라 하였으나 불과 8년 후에 굴욕적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빼았기고 만다.


이 을사늑약을 체결한 곳이 '중명전'인데 덕수궁과 그 사이에 미대사관이 있어 중명전을 덕수궁의 일부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듯 하다.


어쨋던 덕수궁은 민족의 격동기에 나라를 빼았기는 현장을 본 비운의 궁궐이다. 고종은 조선조 27대 왕들 중에서 가장 불행한 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주의 왕으로 전락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왕처럼 말이다.

 

 


덕수궁은 또 하나의 역사적 비극의 현장이 되는데, 이것은 선조에 이어 왕이 된 광해군의 슬픈 얘기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자기가 죽인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있던 덕수궁에 끌려와 인목대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스무 몇가지 죄상을 고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런 굴욕은 약과였다. 인목대비는 어린 아들 영창대군을 죽인 철천지 원수 광해군의 목숨을 원했다. '이혼(광해군의 이름)을 죽여라'라고 명했으나 반정주체세력들은 광해군을 죽이면 저들과 다를 게 없다며 대비의 명을 끝까지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인목대비는 끝내 광해군이 죽는 것을 보지 못하고 48세의 나이로 광해군 보다 9년 앞서 죽는다. 그렇다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도 부질없는 건가 보다.

 

 

 

 

광해군은 사약을 내리는 대신 강화도로 귀양을 보냈는데 그 뒤 제주도에 귀양가서 18년을 고생하다가 죽었다. 당시 제주도는 먹을 것이 매우 부실했는데 반찬 투정이 심했다 한다. 부인은 강화도에 귀양간지 7개월만에 자진했는데 광해군은 그 긴 18년에 걸친 치욕을 겪다가 66세에 별세했으니 그 긴긴 세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을가.

 

 

 

다산 정약용은 유배생활 18년간 수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목숨이 그렇게 모진것일가.

15년이나 왕으로 군림했던 그가 그런 굴욕을 견뎌낸 것은 인간적으로 많은 것을 성찰하게 한다.


고종은 44년을 집권했지만 실권은 집권기간 대부분 대원군과 명성왕후가 휘둘렀고 권력의 우산에서 벗어난 것은 12년이었으나 그 나마 갑신정변, 동학혁명,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을 거치면서 일본의 손아귀에서 왕 다운 왕 노릇은 하지 못하고 항상 노심초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100여 명의 일본 浪人(일종의 군인인 사무라이가 못된 자)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명성왕후를 시해한 다음 시체을 불태워 시신없는 릉으로 장사했으니 고종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 굴욕도 광해군이 당한 치욕에 못지 않았으리라고 짐작된다.


불과 100여 명의 외국 깡패가 일국의 왕궁을 침범하여 국모를 시해했으니 그것이 어찌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시 대한제국의 병력은 6천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오호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