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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인물탐방(방촌 황희선생유적지)

도솔9812 2013. 8. 26. 22:03

 

                                              (20) 역사속의 인물탐방(방촌 황희선생유적지)

                                                     2013.8.22/죽암 장석대

 

 

                                                방촌 황희선생 유적지 탐방은 사진작품성을  떠나.

                 조선시대 대표적 淸白吏로 알려진 황희정승의 생애를 조명하는 데 있었다.

 

                  ※ 찾아가는 길:경의선 문산역 1번출구 앞 버스정류장→053번 마을 버스→반구정 버스정류장에서 하차. 

 

 

 

 

 

                  

    방촌 황 희(尨村 黃 喜)

   조선시대 최장수 청백리 정승

 

    1353년(공민왕 12년)~1452년(문종 2년),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자는 구부

    (懼夫), 호는 방촌(尨村), 석부(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균비(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현대부판강릉대

    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고, 개성 가조리(可助里)

    에서 출생하였다.

    1376(우왕 2년)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에는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년) 성균관 학록이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

    門洞)에서 은거하다가 1394년(태조 3년)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 학관이 되었으며,

    세자의 스승인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쳐, 6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태종의 신뢰를 받았으나 1418년 세자(양녕대군) 폐출의 불가함을 강하게 주장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폐서인이 되어 교하(交河)와 전라도 남원(南原)에 5년간 유배되었다가 태종의 건의로 세종에 의해 다시

    복직되었다. 이후 굶주림이 장기화 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나가 백성의 어려움을 잘 살피고 민심을 얻었으

    며 동시에 세종의 신뢰 또한 얻게 된다. 이후 이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 겸 세자사(世子師:세자의 스승)

    등을 지냈으며, 1431년(세종 13년) 69세의 나이로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18년동안 세종을 잘 보필하며 태평성대를 이끌다가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은퇴한 뒤에도 국가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파주 문산 반구정에서 갈매기와 같이 여생을

    보내다가 향년 90세에 서거하여 파주 탄현 금승리에 안장되었다.  

 

 

 

 

 

 

                    

    황희와 세종

   세종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신하를 불러들이다.

 

    두문동에서 나온 황희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나 양녕대

    군(세종의 형)의 세자 폐위에 반대하다 유배되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황희 사람됨을 눈여겨

    본 태종이 다시 불러 세종에게 청거했다. 그때가 세종 4년(세종 26세,황희 60세)이었다. 자신

    의 즉위를 반대하던 신하를 유배지에서 불러 과전을 돌려주며 관리로 다시 등용한 것은 세종

    의 대단한 인사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또한 원칙과 소신이 있고, 관용하고 배려하는

    황희의 사람 됨됨이를 높이 평가하며 늘 곁에 두려 했다.

    세종은 분명하고 강력한 청치력이 요구되는 부분을 주로 황희에게 맡겼다. 황희로 하여금 변

    방의 안정을 위해 6진을 개척하고 4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토록 했고, 외교.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의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겼다. 몇 번이나 노부의 병간

    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황희는 24년간 내각에 있

    으면서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18년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황희가 탄핵을 받을 때마다 혹은 고령을 이유로 여러번 사직을 청할 때마다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결국 1449년(세종 31년),무려 87세까지 노익장을 과시하며 영의정자리를 지키다가

    스스로 물러났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세종의 정치에 조언을 했으며, 세종 사후에는 문종의치세에도 도움

    을 주었다. 황희는 사후 "익성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세종에게 제향을 올릴 때 같이 제향

    을 올리는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는 학덕이 높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격이 치밀하여 공무처리의 귀제로 불린 사람이었다.

    인권을 존중하여 노비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은 인정 많고 사람 좋은 선비였다. 조선시대 최

    장수 재상으로 있었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청렴함에 대한 일화가

    황희정승이라는 애칭과 함께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우리들 몸이 없어진 뒤의 일은 단지 청렴렴(廉)자(字) 하나를 지키는 것이다.

 

이 글귀는 황희정승이 안성(安省)의 임종석(臨終席)에서 영결(永訣)로 써준 시이다.

안공은 경주인 인데 광양군(廣陽君)에 봉해졌으며, 관직은 대사간(大司諫)이었다.

황희정승이 안공의 병환이 심하다는 소문을 득고 바로 문병을 갔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때 안공이 운명 중이이어서

황희정승이 그의 손을 잡고 영결인사를 한 다음 이 궐귀를 써 주었다. 이 시는 안공의 가승(家乘)에 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유래(由來)]
  고려가 망하자 그때까지 섬겨온 왕을 배반하고 새로운 왕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 고려의 신하 72명이
    벼설을 버리고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모든 길을 막아 빗장을 걸어
    놓고(杜門)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不出)에서 유래했다.
 
    새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유능한 신하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러 번에 걸쳐 그들을 설득했으나 
    허사였다. 그들 27현(賢)은 산골 마을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면서 아무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유래됐다고 한다.
    
    두문동에 함께 들어간 황희도 처음에는 태조의 부름에 거절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어도 백성은
    바뀌지 않았으니 백성을 위해 일할 젊은 인재는 밖으로 나가야한다는 두문동 선비들의 권유와 설득으로 산
    에서 내려오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때 황희의 나이 30세였다. 
    조선건국초기에는 두문동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정조 7년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고려의 
    충신인 두문동 72인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 황희정승의 유품

 

△ 옥연(玉硯)-옥으로 만든 벼루

 

 

△ 서호영(瑞瑚纓)-갓에 다는 끈.

                 29개의 산호를 꿰어 만든 길이 100cm의 갓끈, 서진, 서각대, 옥연과 함께 황희정승이 생전에 사용하던 유물로,

                                황사웅(黃士雄)에게종가의 보물로 여겨 잘 보존하라고 분재문서에 기록하여 전하였다. 

 

△ 서각대(犀角帶)-조선시대 관리가 허리에 두르던 무소의 뿔로 만든 띠.

서호영,서진, 옥연과 함께 황희정승이 생전에 사용하던 유물로, 황희의 증손 황정(黃珽)이 그의 아들 황사웅(黃士雄)에게

   종가의 보물로 여겨 잘 보존하라고 분재문서에 기록하여 전하였다.  

 

 

 

 

 

 

 

 

 

 

 

 

 

 

 

 

 

 

 

 

 

 

 

 

 

 

 

 

 

 

 

 

 

 

 

 

 

 

 

 

 

                                   ▲ 방촌기념관 바로 담넘어에 있는 "반구정 나루터집"

 

     일산에서 늦게 출발한 탓도 있거니와 문산역 앞에서 반구정으로 가는 마을버스(1시간 간격 배차)를 타고

       현지에 도착하니 12시40분이었다. 점심먹을 생각은 잊고 곧장 방촌기념관으로 들어서니, 바로 담넘어

      "반구정 나루터집"에서 풍기는 장어구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