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숲, 종묘를 거닐다
종묘는 종로3가에 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서민들이 오막조막 살던 동네로, 흙담에 초가의 낡은 집들이 밀집하여 해방 이후 '종삼사창가'가 있던 곳으로 악명이높았던 곳이다. 그러다가 불도저 서울시장 김현옥이 1968년에 '나비작전'으로 이 일대를 강제로 폐쇄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이곳의 집들을 모두 헐고 종묘 입구에 제법 넓은 광장을 조성하여 노인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이곳에는 햇볕을 가려주는 큰 나무도 있고 벤취도 잘 갖추어져 있어 파고다공원보다 환경이 한 등급 위다.
종묘에 들어서니 울창한 숲이 펼쳐 지는데, 내가 청춘이라면 곧 다가올 낙엽길을 아름다운 여인과 이브 몽땅의 "고엽"을 함께 부르며 고궁을 산책하리라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온다.
우리나라의 종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392년(고구려 고국양왕 9)에 보이며, 신라에서는 5묘제, 고려에서는 7묘제로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5묘제도를 따르다가 중기 이후부터는 치적이 많은 왕은 5대가 지나도 정전에 그대로 모셨으며, 그 밖의 신주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는데, 이를 조천(祧遷)이라고 하였다.
종묘 정전에는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신주를 모셨으며,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및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모셨다.
신주의 봉안 순서는 정전의 경우 서쪽을 상(上)으로 하고 제1실에 태조가 봉안되어 있고, 영녕전에는 추존조(追尊祖)인 목조(穆祖)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ㆍ환조(桓祖)를 정중(正中)에 모시고 정전과 마찬가지로 서쪽을 상으로 하여 차례대로 모셨다. 이를 소목제도(昭穆制度)라고 한다.
그 뒤 1546년(명종 1)까지 계속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왕실과 나라를 뜻하며, 종묘는 역대 왕들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 사직은 토지 신과 곡식 신. 따라서 국가를 나타낸다.
이만큼 위패는 중요하여 임진왜란 시는 광해군이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고 함경돠지 피난 갔으며, 병자호란 때는 우의정을 사직한 김상용이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화약을 쌍아 놓고 자폭했다. 종묘에 들어서면 고려 공민왕의 사당과 초상이 있는데 역성혁명을 한 태조 이성계는 공민왕에 대한 미안감이 있어 여기에 조그만 사당을 지어 주었다 한다.
여기에 모신 왕들의 면면을 보니 몇가지 소회가 떠오른다.
가장 위대한 왕은 단연 세종대왕으로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의 최고 통치자 중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통치자라고 평가하고 싶고 그 다음은 한참 못 미치지만 정조대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 모신 역대 왕들을 살펴 보면, 최장수 임금은 83세에 붕어한 영조이고, 그 당시에는 장수라 할 수 있는 50살 이상이 52%인 14명으로, 태조가 73세, 정종이 62세, 예종이 69세, 고종이 67세 등이다.
재위기간을 보면 평균 19년으로, 최장 집권은 역시 영조 51년이고 숙종이 45년, 고종이 43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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