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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숲, 종묘를 거닐다

도솔9812 2013. 9. 6. 15:36

 

 

 

 

                      도심의 숲, 종묘를 거닐다

 

 

 

 

종묘는 종로3가에 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서민들이 오막조막 살던 동네로, 흙담에 초가의 낡은 집들이 밀집하여 해방 이후 '종삼사창가'가 있던 곳으로 악명이높았던 곳이다. 그러다가 불도저 서울시장 김현옥이 1968년에 '나비작전'으로 이 일대를 강제로 폐쇄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이곳의 집들을 모두 헐고 종묘 입구에 제법 넓은 광장을 조성하여 노인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이곳에는 햇볕을 가려주는 큰 나무도 있고 벤취도 잘 갖추어져 있어 파고다공원보다 환경이 한 등급 위다.

 

 

종묘에 들어서니 울창한 숲이 펼쳐 지는데, 내가 청춘이라면 곧 다가올 낙엽길을 아름다운 여인과 이브 몽땅의 "고엽"을 함께 부르며 고궁을 산책하리라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온다.


청춘은 나이에 있지 아니하고 마음 가짐에 있다 하지만 종심(從心)의 언덕에 오른 나의 스러져 가는 가슴을 낭만에 불 타는 청춘으로 되 돌려줄 정신적 비아그라 또는 타임머신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각설하고, 종묘는 1995년 우리나라 최초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석굴암과 더불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리 만큼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중국 은나라에서 3묘제로 처음 시작된 종묘제도는 주나라시대는 7대조까지 봉안하는 7묘제가 시행되다가 명나라 때는 9묘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이후 중국에서 창시된 종묘제도는 실전되어 우리나라에서 역수출한 문화이기도 하다. 종묘는 원래 정전(正殿)을 가리키며,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종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392년(고구려 고국양왕 9)에 보이며, 신라에서는 5묘제, 고려에서는 7묘제로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5묘제도를 따르다가 중기 이후부터는 치적이 많은 왕은 5대가 지나도 정전에 그대로 모셨으며, 그 밖의 신주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는데,

이를 조천(祧遷)이라고 하였다.

 

 

종묘 정전에는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신주를 모셨으며,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및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모셨다.

 

 

신주의 봉안 순서는 정전의 경우 서쪽을 상(上)으로 하고 제1실에 태조가 봉안되어 있고,

영녕전에는 추존조(追尊祖)인 목조(穆祖)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ㆍ환조(桓祖)를 정중(正中)에 모시고 정전과 마찬가지로 서쪽을 상으로 하여 차례대로 모셨다. 이를 소목제도(昭穆制度)라고 한다.

종묘의 조영(造營)은 1394년(태조 3) 12월 태조가 한양(漢陽)으로 천도할 때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동쪽에 영건(營建)을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1차 완공하였다.

 

 

그 뒤 1546년(명종 1)까지 계속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왕실과 나라를 뜻하며, 종묘는 역대 왕들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 사직은 토지 신과 곡식 신. 따라서 국가를 나타낸다.

 

 

이만큼 위패는 중요하여 임진왜란 시는 광해군이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고 함경돠지 피난 갔으며, 병자호란 때는 우의정을 사직한 김상용이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화약을 쌍아 놓고 자폭했다.

종묘에 들어서면 고려 공민왕의 사당과 초상이 있는데 역성혁명을 한 태조 이성계는 공민왕에 대한 미안감이 있어 여기에 조그만 사당을 지어 주었다 한다.

 

여기에 모신 왕들의 면면을 보니 몇가지 소회가 떠오른다.

 

가장 위대한 왕은 단연 세종대왕으로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의 최고 통치자 중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통치자라고 평가하고 싶고 그 다음은 한참 못 미치지만 정조대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머지 왕들은 극소수의 권문세가의 권력다툼과 이해관계에 휘둘려 왕권유지에만 급급하여, 고달푼 민생과 개혁을 위하여 무슨 업적을 남겼는지 안타갑기만 하다.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사전춘추 등을 편찬하기도 하였으나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의 등장에 빌미를 주었으니 성군이라 할 수 없겠다.

다음은 중종인데 중종은 반정으로 왕에 등극하여 조정의 훈구대신들을 억제하고 개혁정치를 하고자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림파를 중용하였으나 사림파 대신들이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자 이들에게 싫증을 느끼고 기묘사화를 잠 재우지 못하여 조광조 일파를 유배보내고 조광조에게는 사약을 내렸으니 이 또한 실패한 개혁정치였다.


하나 숙종을 꼽을 수 있겠는데 그는 암행어사의 활용과 손수 잠행으로 민심을 파악하여 소통정치를 하고자 했으나 남인이 잠시 득세하여 서인인 송시열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어 당파싸움을 더욱 격렬하게 하였고 조선조 최대의 요녀 장옥정(장희빈)과의 사랑에 빠져 나라를 혼란케 했으니 이 또한 지도자로는 평가 받을 수 없다 하겠다.


 

여기에 모신 역대 왕들을 살펴 보면, 최장수 임금은 83세에 붕어한 영조이고, 그 당시에는 장수라 할 수 있는 50살 이상이 52%인 14명으로, 태조가 73세, 정종이 62세, 예종이 69세, 고종이 67세 등이다.


당시 왕들은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을 것이며 다이어트에도 관심이 없었을 것이며 의학수준도 오늘날에 비하면 한참 아래일 터 인데 장수를 한것은 경이롭기만 하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시대 평균수명은 34세였고,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 수명은 32.4세였고 여성은 35.1세였다.

특히 영조는 66세 때 15세의 정순왕후김씨와 혼례를 올렸으며 부인이 6명이나 되었는데 그 정력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어머니가 건강한 무수리 출신이니 유전자 덕택아닌지 생각해 본다. 건강한 노후를 결정짓는 변수는 유전적 요인이 30%라고 한다. 이건 순전히 나의 억측일 뿐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

장자승계는 10명 뿐이고, 부인은 평균 7명으로 성종과 중종이 12명, 태종이 11명 순이다.
자녀는 아들 5명, 딸 4명 등 평균 9명으로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왕은 성종이 38명 그 다음은 태종 29명이고 그 바쁘셨을 세종대왕도 22명이다.


그런데 14대왕인 선조가 25명인데 그 이후 27대 까지 자녀가 10명이상은 한분도 없다. 자식이 귀해지면 가운(왕조시대이니까 국운)이 기운다는 속설에 신빙성을 주게 되는 대목이다.

 

재위기간을 보면 평균 19년으로, 최장 집권은 역시 영조 51년이고 숙종이 45년, 고종이 43년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