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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없는 박물관 강화도

도솔9812 2013. 8. 27. 12:50

                                                                 애기봉에서 바라다 본 북한/개풍군

 

 

                                 

                          지붕없는 박물관, 강화도

 

 

 

 

 

어제(8/26) 신문 보도에 의하면 세계기록유산인 고려 팔만대장경의 제작 장소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강화도가 아니라 경남 남해군이었음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가 나왔다고 한다. 지금까지 팔만대장경은 강화도 선원사에 설치한 '대장도감'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무신 정안(鄭晏)이 남해로 은퇴한 뒤 대장경의 반 정도를 간행했다'는 '고려사' 열전의 기록 등을 근거로 '남해 제작설'도 제기됐다. 그래서 지금까지 '강화.남해 공동 제작설'이 나왔는데 이번에 전체 대장경에 대한 실증 결과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어, 남해에서 만든 대장경이 강화 선원사로 옮겼다가 조선 초 해인사로 다시 옮겼다는 것이다. 이렇다면 강화도는 팔만대장경을 제작한 장소라는 문화유산을 잃게 되는 셈이다.

강화도는 전등사를 비롯해 곳곳에 문화유적이 즐비하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에 창건 된 사찰로,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 372년이므로 한국 최고(最古)의 사찰이다. 그래서 강화도하면 누구나 전등사를 연상하게 된다.


강화도는 그만큼 문화유산이 많다. 그러기에 강화도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도 하고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라고도 한다. 하지만 강화도는 뼈 아픈 역사를 수도 없이 많이 겪은 수난의 현장이기도 하다. 뭐 하나 뚜렷하게 자랑할만한 역사가 없다. 있다면 고인돌, 전등사 그리고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았다는 마니산의 참성단 정도라 할가?

 

 

 

강화도 북쪽에는 크리스마스 점등으로 유명한 애기봉(愛妓峰)이 있다. 애기봉에는 전설이 있다.
1636년 조선 인조 14년 청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범한 병자호란 시 평안감사는 가장 사랑하는 애첩 "애기"를 데리고 수도 한양을 향해 피난길에 오르는데 바로 강 건너 개풍궁에서 감사는 청나라 오랑캐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고, "애기"만 한강을 건너 이곳 김포반도 조강리 마을에 머믈게 되었다.

"애기"는 매일 이 봉우리에 올라와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일편단심으로 감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마침내는 죽어가면서 "님"이 잘 보이는 이 봉우리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1966. 10. 7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시 "애기"의 사연을 듣고 "애기"의 한(恨)을 강 하나에 사이에 두고 오가지 못하는 우리 일천만 이산가족의 한과 같다면서 이름없던 이 봉우리를 애기봉이라 명명하였다.


"기생 妓"자를 이곳 최전선 봉우리에 이름 붙혀 준 것은 용감무쌍한 해병을 조금이나마 위안케 해 주려는 박대통령의 배려가 아닐까? 박대통령도 낭만을 알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연미정(燕尾亭),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서해와 인천으로 물길이 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를 닮았다 하여 연미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옛날에는 서해로 부터 한양으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리고 조류를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들어 갔다. 건립년대는 정확치 않지만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1627년 정묘호란(인조 5년)때 인조는 강화도에 100일 간 피난했다가 연미정에서 후금(훗날 청)의 아우가 되는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 불운의 인조는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시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 차단되자 남한산성으로 도망가 47일을 버티다가 결국은 잠실 삼전도에서 청태종(후금)에게 신하가 되는 군신의 예를 갖추고 참담한 항복을 하였다.


영조 20년(1744)에 중건되었고 1891년 중수한 후 여러차례 보수하였는데 5백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두 구루가 있어 아름다움을 더 하고 있었다.


다음은 고려의 임시 수도 강도(江都)의 궁궐터를 찾았다. 고려 중기(고종19년) 몽골이 침입해 오자 무신정권 최우의 주도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고 39년간을 싸웠다.

 

 

당시 이주민이 2~3십만명이라고 하는데 이는 믿을 바가 못된다. 그 많은 백성이 먹을 식량이 어디서 공급되며 지금의 강화인구가 7만명이고 한말의 서울 인구가 25만명임에 비추어 보더라도 신빙성이 없다.

39년이라는 긴 항전 끝에 강토는 황폐해지고 백성은 기진맥진하여 헤어날 길이 없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몽골의 요구대로 왕궁과 성곽을 스스로 허물고 나와 항복한 후에 개경으로 환도하고 말았다.

그 후 빈터로 남아 있던 고려궁터는 조선인조 때 행궁(行宮)을 건립하고 강화유수부(종2품), 외규장각을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함락되었으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완전히 소실되는 등 수난의 역사를 거듭하였다. 지금은 다시 지은 강화 유수부동헌, 이방청, 외규장각이 있다.



 

다음에 들린 곳은 강화도령(철종)의 잠저(暫邸)인 용흥궁이다. 당시는 茅屋(초가집)이었다 하며 터도 훨씬 협소했다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답사기를 접고 평소 내가 생각하던 나의 역사관을 감히 피력하고자 한다.

철종이야말로 시쳇말로 로또를 잡은 것이다. 그는 도저히 왕이 될 수 없는 족보였다. 비운의 사도세자의 셋째아들인 은언군은 형이 모함에 걸려 사약을 받고 죽는 것을 보고 강화도에 피신하여 살았다.


은언군의 아들이 전계군이고 전계군의 셋째아들이 원범(철종)이다. "君"이란 칭호도 받지 못한 하잘것 없는 왕족이었다. 철종은 1849. 6 에서 1863. 12 까지 14년 6개월 간 왕위에 있었다. 그 즈음에 일본은 명치유신을 단행하고 근대화의 막을 열었다. 그러면 같은 시대인 1800년대의 우리나라를 살펴 보겠다.

조선 왕조에서 세종대왕 다음으로 업적을 남긴 22대왕 정조가 1800년 48세 나이로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장인인 김조순 일당인 안동 김씨 일문이 세도정치의 길을 열었으며, 순조가 붕어하자 헌종이 8세의 나이에 등극을 하고, 그가 서거하자 강화도에서 나무꾼이나 하던 정조의 이복동생 은원군의 손자를 왕에 옹립하였다.

 

 

이가 16세의 철종인데 그는 헌종의 7촌 아저씨 뻘 되는데 조선조에서 항열이 위인 사람이 왕이 된 예는 세조 밖에 없다.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억지로 끌어 내리고 스스로 왕이 된 경우고, 철종은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기 위한 희대의 꼼수이었다.

더 가관(可觀)인 것은 26대왕 고종인데, 그는 16대왕 인조(1596~1649)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은신군(사도세자인 장조의 둘째 아들)의 3대손(족보상으로는 영조의 고고손자)으로 헌종의 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와 고종의 아버지인 이하응이 결탁하여 안동김씨를 조정에서 내쫓기 위한 음모의 작품이였다. 고종을 조대비의 큰 아들 익종(등극 전에 죽은 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24대 헌종의 형님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고종은 조선조의 왕통과는 촌수가 너무 멀고 이런 식으로 즉, 양자로 입적시키는 방법으로 왕을 등극시킨다면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누구나 왕을 한번 노려 볼만한 한심한 형국이었다. 조선조 말은 이렇게 나라 돌아가는 꼴이 엉망진창이었다.

정조는 賢君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기에 정조를 정조대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뒤를 이은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은 정말로 형편없는 허수아비 왕들이었다. 왕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힘이 없었다. 무엇 하나 한 것이 없다.

5명의 왕이 재임하던 100년 동안 안동김씨가 60년이나 나라를 농간하고 대원군이 10년, 민비가 22년 나라를 주물렀다.

고종은 43년 7개월 동안 임금자리에 있었으나, 32년은 아버지와 마누라가 실권을 가지고 정치를 하였고 민비가 시해된 후 12년 정도 통치를 하였으나 그 마져 일본을 위시한 열국의 압력으로 정치다운 정치는 하지도 못했고 마침내 일본의 압력으로 순종에게 임금자리를 물러 주었다.

정조가 1800년에 붕어하고 꼭 100년 뒤인 1900년에 나라를 일본에 빼았겼는데 조정이 썩은 것은 그렇다 치고 그 1백 년 동안 조선의 선비들은 무엇을 했는지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

해답은 '성리학'이다. 유교의 이론을 주자가 접목한 성리학은 정몽주가 처음 고려 말에 도입했는데 성리학의 기본이념은 충효이다. '나라(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는 조선조의 절대적인 가치이념이었다. 임금은 나라의 상징이었다.

또한 남존여비로 여성을 탄압했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치 않했으며 서얼(庶孼)차별이 철저하여 서자(庶子)는 벼슬길에 오를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게 했다.

 

더 중요한 것은 노비는 대를 이어 영원히 노비로 물건취급을 당했고 실학과 양명학을 탄압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화발전에 장애가 되었다. 중국에서 시작된 성리학은 조선시대 크게 발전하여 세계에서 독보적인 학문이 되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자랑할 만한 게 안된다.

따라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은 꿈도 꾸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성리학에 철저히 세뇌(洗腦)되어 반란을 일으키는 데 동조하지 않았다. 연산군과 광해군을 몰아낸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폭정에 못 이겨 왕통을 바꾸는 정도였다.

 

 

이괄의 난, 정여립의 난, 홍경래의 난이 있었지만 이들 모두 스스로 왕으로 자칭(自稱)하지는 않했다. 아마 반역이 성공했더라면 명분을 얻기 위해 또 왕통인 이씨(李氏)를 옹립하였을 것이다.

정조가 서거한 후 11세의 순조, 8세의 헌종, 16세의 나뭇꾼 철종, 무늬만 왕통인 12세의 고종이 등극을 했으니 조선의 운명은 다한 것이다.

고려말이 어지럽자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여 새 하늘을 열었듯이 그때 나라를 갈아 엎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양반들은 감히 기성세력에 도전하지 못했고 더 큰 장애는 그 몹쓸 성리학의 충효정신이었다. 감히 왕권에 도전하지 못한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성립될 수 없지만 그때 명분은 충분히 있었으므로 왕(王)을 몰아내고 나라를 사유화한 안동 김씨를 처단하는 한편 천주교를 받아드리고 나라를 개방했더라면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더 먼저 근대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정약용 등 실학파를 중용하여 개혁을 하고자 했던 정조가 1800년에 붕어했는데 일본의 명치유신은 1867년에 단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정조가 서거하고 11세의 순조가 왕이 되자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실세 중의 실세로 부상하여 안동 김씨, 일명 장김(경복궁 서쪽 장동에 모여 산다고 해서 붙여지진 이름)은 나라를 완전히 사유화하여 뇌물이 성행하고 벼슬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이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등 국정을 농간하였다. 백성을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동 김씨라고 해서 모두 권력자이었던 것은 아니고 장동에 사는 김조순, 김좌근, 김문근, 김병학, 김병국, 김병기 등 일파만이 실세였다.

이들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성혁명은 하지 않더라도 천주교를 허용함으로써 서양문물을 받아드리고 국정을 개혁했더라면 일본보다 더 먼저 우리나라가 선진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의 관리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사복을 채우기에 급급하였다. 세금을 걷어도 조정으로 가지 않고 중간에서 대부분 짤라 먹었다.

그런데도 이에 과감히 반기를 든 세력들은 없었다. 조선시대 말의 양반들은 모두 '나라에 대한 충성'만 외치고 있었다. 그러기에 고종이 붕어했을 때 조문객이 전국에서 10만 명이나 모여들었다 한다. 당시 서울 인구가 25만 명이었다.

이렇게 무력했던 양반들이 나라를 빼았기자 정신을 차려 목슴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였다. 금쪽 같은 논밭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으로 보탰고 윤봉길,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있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이러한 힘을 분출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본은 사무라이가 나라의 주축이었고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하는 선비의 나라였다. 그러기에 전쟁이 나면 총사령관은 문관(文官)출신으로 임명하였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이것은 무인(武人)에게 총사령관을 맡기면 반역할 가봐 두려워서라 한다. 성웅 이순신도 임진왜란 때 백의 종군을 하고 압송도 당하는 등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가?

나는 정조가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정조 이후에는 왕권(王權)은 소멸하고 신권(臣權)이 나라를 지배하였다. 따라서 사실상 옹조(王朝)는 무너진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누차 말한 바와 같이 정조 이후 5명의 왕은 한결같이 10살을 전후한 어린 왕들로 사리분별 능력조차 없어 수렴정청을 하였는데,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외척이나 아버지 또는 부인 그리고 일제가 왕 노릇을 했기 때문에 5명의 왕은 사실상 왕이 아니고 이름뿐인 허수아비 왕이었던 것이다.

정조 이후는 계속 자손이 귀해 정조는 아들을 둘을 두었으나 첫째는 일찍 죽었고, 순조도 아들(효명세자 후에 익종) 하나를 두었는데 이나마 일찍 죽어 효명세자의 하나뿐인 아들(순조의 손자)이 왕위를 이었는데 여기서 대(代)가 끊겼다. 철종은 헌종의 7촌 아저씨 뻘 되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고종은 말도 안되는 혈통이었다.

일반 개인 집에서도 자손이 귀하면 가세가 기울기 마련인데 이런 현상이 100년 간 이어진다는 것은 국운(國運)이 다 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정조 이후는 나라가 아니였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나 새 하늘을 열었어야 했다

기회는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1884, 고종21)과 1894(고종31)에 있엇던 갑오경장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최초의 근대화운동으로 성리학의 기본이념을 타파하여, 신분차별 없이 관리를 뽑고, 양반과 상민의 신분차별을 없애며 과부의 재혼을 허용하자는 것 등이다.

성리학이 도입되기 전인 고려 무신시대 도방의 영수 최우와 기생 간에 출생한 최항이 도방을 세습했으며, 김준은 노비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위관직에 올라 제4대 도방의 영수 최의를 죽이고, 60년 최씨 무신정치를 끝내고 도방을 철폐하여 왕권을 회복 시켜주고 자신은 10년간 권력을 장악했다.

세계역사를 보면 고비고비 마다 혁명이 일어나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대혁명, 러시아의 볼세비키혁명 등을 들 수 있겠다.지금은 민주주의이니까 선거를 통하여 정권을 갈아치우고 지도자를 바꾸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다섯번째로 큰 섬이며 인구 7만의 강화도는 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낸 슬픈 섬이다. 지금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60여년간 남북이 예리하게 대치하고 있는 분쟁의 현장으로, 강너머 개풍군이 코 앞에 고스란히 보여 이산가족의 애간장을 태우게 하고 있으며 연산군과 광해군의 유배지로 광해군의 부인이 아들의 도망사건으로 자살한 슬픈 스토리가 있는 섬이다.

역사를 거슬려 올라가 보면, 1232년(고려 고종19)몽골침략으로 39년간 천도를 했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가 피신했다가 청나라 오랑캐의 아우가 되는 형제지의를 맺고 항복했으며, 1637년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 효종) 청의 포로가 되어 청나라 수도 심양을 끌려갔고, 그때 종묘의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신한 김상용은 강화도가 청나라군에 함락되던 날 화약을 몸에 품고 자폭했다.

1866년(고종3) 프랑스함대가 천주교학살을 핑계삼아 강화도를 침입하여 외규장각의 의궤와 서적 일부를 탈취한 후 나머지 서적과 전각을 전소 시킨 병인양요를 겪었다.

1871년(고종8) 미국함대가 셔먼호의 대동강사건에 대한 배상과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군이 그들에게 일격을 가하는 "손돌목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가 그들에게 일시 점령되는 신미양요를 당했다.

1876(고종13)의 일본군함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의 의무만 강요한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맺고 제물포항, 부산, 원산항을 개항하는 등 수난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한 때는 비록 영광스럽지는 않았지만, 역사의 소용도리 속에.온갖 고초를 겪었던 강화도는 지금은 인삼재배, 화문석 그리고 순무재배단지 정도로 기억되는 역사의 뒤안 길에 물러 앉은 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