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의 생애
일명 궁복(弓福)·궁파(弓巴).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武寧君小將)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奴婢)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귀국했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자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37년(희강왕 3)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祐徵:神武王)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자 진해장군(鎭海將軍)이 되었다. 840년(문성왕 2)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 845년(문성왕 7)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보내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846년(문성왕 8) 그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막강한 군사력과 부를 보유한 장보고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 귀족들은 문성왕의 차비 간택문제를 계기로 장보고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장보고의 부하였으나 장보고를 시기하고 중앙정치무대에서의 신분상의 지위향상을 노리고 있던 염장을 보내 문성왕 8년인 서기 846년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장보고의 약력
장보고의 출생연도와 장소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한국사에서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부족할 뿐만아니라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출생연도
신라 애장왕(AD 800∼809) 시기로 추정
▣ 출생지
완도의 해안지방이라고 추정하고 있음
▣ 그의 이름
궁복·궁파 - 한국측 기록, 활을 잘 쏜다는 뜻
장보고(張保皐) - 중국측 기록, 궁복과 궁파의 중국식 발음에서 온 것으로 추정
장보고(張寶高) - 일본측 기록, 재물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추정
▣ 그의 의형제
완도에서 같이 자라고 무예를 익힌 고향 아우, 정년
▣ 어린시절의 장보고
장보고는 뛰어난 무예와 함께 사람들을 지휘하는 통솔력을 지님
▣ 장보고의 입신 과정
① 당나라 무령군 장교로서 반당 세력 토벌
②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 소탕
③ 왕위 계승문제에 개입하여 진해장군과 감의군사가 됨
▣ 장보고와 이정기의 관계는?
장보고는 당나라 무령군의 장교이고 이정기는 반당 번진의 장군임
▣ 이정기 토벌 후에는?
신라에 귀국한다.
▣ 당시 신라의 해적 피해는?
해적들은 신라인을 노예로 매매하고, 육지에 상륙하여 민가를 약탈함
▣ 해적의 준동을 본 장보고의 반응은?
당의 관직을 버리고 신라로 귀국하여, 흥덕왕에게 청해진 설치 건의
▣ 청해진 설치 후에는?
'청해진대사' 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에 종사
▣ 장보고의 관직은?
① 중국의 관직 : 무령군중소장
② 흥덕왕 시기 : 청해진대사
③ 신무왕 시기 : 감의군사
④ 문성왕 시기 : 진해장군
▣ 그의 중요한 업적은?
① 민간무역 질서를 태동시켜 9C 동아시아 사회의 질적 변화를 이끔
②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아시아의 해상교통로를 발전시킴
③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 확대
▣ 장보고의 개인적 능력은?
그는 의롭고 포용력이 강하며 뛰어난 통솔력과 용병술의 소유자로 무역, 외교에 능숙
▣ 장보고의 암살 동기는?
장보고 세력이 확대되고 그의 딸을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되면서 신라 귀족들이 정치적 위협을 느꼈고, 장보고에게 흡수된 군소 무역업자들의 반발등으로 살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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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등장의 배경
8~9세기 동아시아세계의 시대상황 당나라의 경제체제와 조공무역 8세기 공무역체제(公貿易體制)의 성립과 운영 9세기 공무역의 ?訛嘲?사무역의 발달 중앙정치의 혼란과 유이민의 만연
- 8~9세기 동아시아세계의 시대상황 -
8~9세기는 동아시아의 역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에도 매우 흥미롭고 특기할 만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지방의 토호들이 각지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쌓아가며 독자적 세력을 형성해 나가던 지방분권적 체제로 변화해 가던 시기였다.
7세기 초에 중국대륙을 통일한 당(唐)은 율령을 정비하고 제도화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당은, 이러한 정비된 통치체제를 바탕으로하여 중국대륙 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들을 제압하고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세계를 형성하고, 이를 주도해 나갔으며, 개방적이고 세계적인 제국으로서 역사를 전개시켜 나갔다.
그러나 8세기에 접어들어 율령제를 통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는 여러 면에서 그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 모순은 안사(安史)의 난(亂; 755~763)으로 폭발하였다. 이 난의 결과 당에서는 율령에 의한 기존의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사회는 각 지방의 절도사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이른바 번진체제(藩鎭體制)가 성립되었다. 이들 번진세력들은 8~9세기 당의 정국을 주도하며 그들의 세력을 확대하였고, 급기야는 중앙정부에 반항하는 반당적(反唐的) 번진으로 바뀌어 당왕조와 대립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현상은 결과적으로 농민들에게는 당 왕조와 번진세력에게 이중으로 수탈당하는 생활고를 가져왔고, 결국 9세기말에 이르면 황소(黃巢)의 난(亂; 875~884)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세계를 주도해나가던 당은 결국 907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반도의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신라는, 7세기 중엽 삼국을 통일하고 당의 율령제를 수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였다. 이후 100여년간 신라는 사회 각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통하여 발달된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라는 8세기말에 이르러 왕권은 진골귀족들의 도전을 받아 약화되고 진골귀족들이 연합하여 정국을 주도해 갔다. 그리고는 이들 진골귀족들 간에 왕위쟁탈전이 일어나 중앙정부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중앙에서 이러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사이에, 지방에서는 각지의 호족들이 그들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9세기에 이르러 신라에서도 지방분권적 양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러한 양상은 결국 889년(진성여왕 3년) 전국에서 농민반란을 야기하였고, 지방호족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경우도 비슷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동아시아세계에서 가장 늦게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은 7세기 후반에 등장한 야마토정권(大和政權)을 중심으로 종래의 씨족제 국가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해 갔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당의 율령제와 신라의 문물까지도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8세기 이후 율령제는 갖가지 모순을 드러내게 되었고, 9세기에 와서는 정치권의 붕괴양상까지 뚜렷해졌다. 국가권력의 상징인 천황의 권위는 추락하였으며 이를 대신하여 귀족세력인 후지하라씨(藤原氏)에 의해 ‘섭정정치(攝政政治)’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중앙에서는 귀족세력의 전횡이 이루어지고 지방에서는 토호들이 세력을 신장하여 각지에서 할거하더니 결국에는 쇼해이(承平)·덴기요(天慶)의 난(935~941)으로 이어졌다.
일본에 있어서 이러한 변화는 이후의 역사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승평?천경의 난을 통하여 각지의 토호들은 이른바 ‘무사(武士)’로 성장하면서 이후 일본에서 전개되는 봉건적 정치질서를 주도해 나가게 된 것이다.
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
청해진이 설치되기까지의 배경 청해진의 설치 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
- 청해진이 설치되기까지의 배경 -
신라 하대(下代 : 780~935년)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당(唐) 나라에 유학을 하였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지식의 습득과 출세를 위한 자신들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골품제(骨品制)라는 엄격한 신분 체제 아래에서 제한된 관직과 정치적 출세에 제약을 받던 6두품(頭品) 이하의 신분층을 정치권에서 축출·도태시키기 위한 신라 정부의 방침도 어느 정도는 작용한 것이었다. 아울러 신라 사회 내부의 왕권(王權)을 둘러싼 쟁탈전이나, 경제 질서의 문란 등 정치·사회적 혼란도 당 나라로의 유학을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장보고(張保皐)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장보고가 당 나라 서주(徐州)의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된 것이 30세 남짓이라 파악되기 때문이다. 본래 해도(海島) 출신이라 알려진 장보고는 신라 신분제 사회에서 그다지 높은 계층은 아니었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그가 중국으로 건너가 곧바로 군대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의 경제력과 자기 지방에서의 실력을 갖춘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특정한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우리 역사에서는 호족(豪族)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세력은 특히 신라 말과 고려 초에 많이 존재했었다. 따라서 아마도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莞島) 태생으로서 뛰어난 무예를 갖고 있었던 해상세력 출신의 장보고는, 보다 넓은 세상에서의 경험과 출세를 위하여 당 나라로 건너간 것이라 보인다.
당시 당 나라도 신분제 사회였기는 하지만, 신라처럼 지배층 사이에서의 차별은 없었다. 또 과거(科擧) 시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회였기 때문에, 신라보다는 개방적인 사회였다. 아마 이러한 점들이 많은 신라 사람들로 하여금 당 나라로의 유학을 결심하도록 한 것이라 보인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장보고는 당 나라로 건너가, 30세 남짓에 무령군(武寧軍) 소장이 될 정도의 출세를 하고, 그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러나 장보고는 당 나라에서 무장(武將)으로 출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820년대 전반기에 장보고는 당 나라에 기반을 두고 신라·일본 등 동아시아 일원의 해상 교역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일본 승려 엔닌(圓仁 : 794~864년)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책에 장보고가 대사(大使)라는 직위를 갖고 824년(헌덕왕 16년)에 일본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에서 잘 확인된다. 이러한 장보고의 활동은 적산(赤山) 법화원(法華院)이 있는 지금의 산동반도(山東半島)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법화원은 일찍이 장보고가 세운 사찰로서, 군대에서 물러나 해상 교역을 시작한 장보고로서는 본래의 연고지인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해상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장보고가 등장하기 이전의 산동반도 일대는 고구려 출신인 이정기(李正己) 가문의 세력 근거지였다. 이정기 가문은 이 지역에서 3대에 걸쳐 신라·발해와의 교역을 통제하여 왔었다. 특히 이정기 가문은 발해와의 교역에 중점을 두어, 중요한 군수품인 말(馬) 등을 수입하고 있었다. 이 당시 신라는 산동반도 지역을 통한 당 나라와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것은 아마 고구려 출신인 이정기가 신라보다는 발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819년에 이사도(李師道)가 당 나라 중앙 정부에 의해 토벌됨으로써, 산동 지역에서 이정기 가문의 영향력은 소멸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도 장보고 세력의 등장에 좋은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이처럼 산동반도는 당시에 중국 대륙과 한반도 및 일본 열도를 연결하는 중요 교통로였다. 또 이들 지역의 나라들은 사신의 왕래를 비롯하여, 일찍부터 민간인들의 왕래가 있었다. 특히 신라 사람들은 산동반도 일대에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자신들의 사회를 이룩하고 있었다. 신라방은 신라인들이 중국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후,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던 사회이다. 산동 지역 신라방은 문등현(文登縣)에 있는 구당신라소(句當新羅所)를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이 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경험과 전통 등이 장보고로 하여금 산동반도 일대를 활동의 중심지로 삼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정기 가문이 몰락할 즈음 산동반도를 둘러싼 황해 일대의 해상 교역은 중국 동해안이나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에 근거를 둔 해적들의 출몰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즉 강력한 통제 세력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여러 해적 집단들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 해적들은 교역선(交易船)에 대한 재물 약탈에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납치하여 노비로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이 때 특히 많은 피해를 보게 된 것이 신라였다. 신라는 본래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황해 일대에서 해상 교통·교류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사신이나 승려들이 중국으로 가고자 할 때에도 신라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가 해적들의 약탈로 인한 피해를 가장 많이 받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완도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바다에 익숙하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바탕으로 당 나라에서 군인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장보고로서는 자연스레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장보고는 해적들의 약탈 행위로 인한 피해나, 그러한 피해를 예방하여야 할 필요성을 누구보다 심각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장보고가 왜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게 되었는지, 청해진 설치의 배경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해적들의 소탕과 안정적인 항해·교역 등의 확보는 장보고가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활동할 경우에도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는 당 나라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등의 옛 기록에는 당 나라에서 활동하던 장보고가 해적들이 신라 사람을 약탈하여 노비로 팔아먹는 등의 행위를 막기 위해, 828년(흥덕왕 3년)에 귀국하여 국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 때 흥덕왕(興德王 : 826~836년)은 장보고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에게 대사(大使)의 직함과 함께 군사 1만 명을 주면서 청해진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러한 짧은 기록을 통해 우리는 청해진 설치의 배경을 장보고 자신의 활동이나 당시의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신라방·신라소 등을 중심으로 하여 산동반도에 존재하고 있었던 신라 세력과, 그에 기반을 둔 장보고의 해상 활동 경험을 들 수 있다. 위에서도 서술하였지만, 신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역을 위하여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당 나라는 세계적인 제국(帝國)으로서, 선진 문물의 산실(産室)임과 동시에 서양 세계와의 교섭 창구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신라인으로 하여금 당 나라와의 교역이나 중국 대륙 지역으로의 진출에 적극성을 띠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장보고의 중국 대륙 진출도 결국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신라인들의 적극성과 진취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장보고 개인은 자기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당 나라로 건너갔고, 또 평소의 뛰어난 무예를 바탕으로 군인으로서의 출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군대에서의 개인적 성취에 만족하지 않은 장보고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었던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상 무역에 눈을 뜨게 되었고, 신라인들이 이루어 놓았던 산동반도 일대에서의 기반을 근거로 적극적 해상 교역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것은 장보고 개인의 역량도 중요한 것이지만, 장보고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었던 산동반도 지역 신라 사회의 저력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상 무역을 주도했던 청해진의 설치는
ⅰ) 신라인들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과,
ⅱ) 그 시대 동아시아 국제 사회에서 필요한 대외 교류와 해상 무역의 중요성을 파악한 장보고의 역사 인식 및 개인적 능력,
ⅲ)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종합적으로 결합하여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산동반도 지역 신라 사회의 저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둘째는 신라 사회 및 중앙 정부의 필요성 때문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신라의 정치적 상황은 여러 차례의 정치적 혼란을 겪었던 혜공왕(惠恭王 : 765~780년) 이후 진골(眞骨) 귀족들 사이에 왕권을 둘러싼 쟁탈전이 심화되어 왔다. 따라서 신라 국왕의 위상은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었다. 특히 헌덕왕(憲德王 : 809~826년)은 자기 조카인 애장왕(哀莊王 : 800~809년)을 죽이고 왕위에 즉위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극단적인 경우까지 경험하게 됨으로써 신라 왕권을 둘러싼 귀족 세력들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그에 따라 국왕의 통치 행위나 중앙 정부의 행정은 국가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권을 잡기 위한 투쟁에 많은 것을 허비해야만 했다. 따라서 자연스레 민생을 위한 정치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헌덕왕 때의 신라 사회는 많은 자연 재해에 시달려야 했?? 화재·홍수 등은 물론이고, 고대 사회에서 하늘의 계시라고 여겼던 천체(天體)의 이상 현상도 자주 일어났다. 또 직접적으로 심한 가뭄과 흉년의 피해를 수시로 입어,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 끼니를 이어가거나 굶주려 죽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천재지변과 자연 재해로 인하여 815년(헌덕왕 7년)에는 고통에 못이긴 백성들이 무리를 이루어 도적질에 가담하기도 하고, 816년(헌덕왕 8년)에는 170~180명의 신라 사람들이 지금의 중국 절강성(浙江省) 지역으로 가서 양식을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신라 백성들이 절강성 지역에까지 양식을 구하러 갈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이전 시기부터 황해를 둘러싼 중국 대륙과 한반도 사이의 해상 왕래가 상당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백성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피해를 주는 자연 재해는 장보고가 등장하는 흥덕왕 시기에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따라서 정권 쟁탈전에 치중하느라 자연 재해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던 신라 중앙 정부로서는 청해진을 설치하겠다는 장보고의 제안을 소홀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장보고의 활동을 이미 알고 있었을 신라 중앙 정부는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해적들을 소탕하여 교역이나 백성들의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정권이나 국가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장보고의 활동으로 인하여 경제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민심의 안정을 꾀할 수 있다면 일거양득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덕왕은 선뜻 1만 명의 군사까지 내어주면서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를 지원했던 것이라 판단된다.
세째는 청해진 설치의 배경과 관련하여 장보고 개인의 의지와 애국심에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완도 출신인 장보고는 평소 바다에도 익숙했지만, 중국에 건너간 후 기마(騎馬)와 창술(槍術)에도 능하여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장보고는 이처럼 뛰어난 무예를 바탕으로 군인으로서 상당한 출세를 한 인물이었다. 또 해상 무역에 관심을 갖고, 군대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산동반도를 근거로 해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인물이다. 따라서 신라 출신으로서 당 나라에서 명예와 함께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장보고 개인의 입장에서는 어지러운 모국(母國) 신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당 나라에서 부유하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는 당 나라에서의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고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리고는 국왕에게 청해진의 설치를 건의하였던 것이다. 장보고가 흥덕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할 때, 그는 당 나라 여러 곳에서 신라 사람을 노비로 삼고 있으니, 해적들이 신라 사람을 약탈하여 당 나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장보고가 해적들 때문에 당 나라에 끌려온 동포들이 노비 신세가 되어 고생하는 것을 직접 보고, 그것을 방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당 나라에서 무장으로 명성을 날리고,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해상 활동을 전개한 경험이 있는 장보고로서는 동포들의 그와 같은 고생을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장보고로서는 여건만 주어진다면 해적들의 약탈 행위를 방지할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당 나라에서의 장보고는 해상 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상인의 위치에 있었을 뿐, 정치적·군사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지위에 있지는 못하였다.
아마 이런 의지와 동포애가 있었기 때문에, 장보고는 신라 국가의 차원에서 해적들의 약탈 행위를 방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장보고는 자신의 능력을 자기 자신의 행복과 성공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국가적·민족적 차원에서 고통받는 동포들을 구하고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국가의 인정을 받는 군진(軍鎭)을 설치하여 자신이 관할함으로써, 해상 교역의 안정을 도모하여 신라에 대한 해적들의 경제적·인적(人的) 약탈을 예방하고자 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몇 가지 점이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게 된 배경 또는 원인이었다고 판단된다. 여기서 우리는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가 갖는 신라사에서의 의미와, 우리 역사에서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장보고 세력의 성격 -
장보고 세력은 우선 지역별로 보면 크게 세 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하나는 당의 산동반도의 적산촌 일원과 운하변을 중심으로 해운력에 바탕을 둔 신라인 촌락과 신라방 사람들이며, 다른 하나는 신라의 서남해안에 위치한 청해진을 근거로 성장한 세력이고, 마지막으로는 재일신라인사회이다.
이 지역들은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로 보아 장보고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적당한 지역이었다. 특히 재당신라인사회와 청해진 두 곳은 그 나라의 변방에 위치하여 중앙정부로부터의 지배나 간섭이 소원하였고, 특히 산동반도는 오랫동안 번진의 발호가 극심한 곳이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신라와 당을 이어주는 해상교통로의 요충이며 일본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이기도 했다. 따라서 동아시아 삼국간의 무역을 통하여 크게 성장한 장보고세력이 가장 좋아할 근거가 될 수 있는 지역이었다. 특히 산동반도는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의 번진이 55년 간이나 군림했던 매우 이질적인 곳이다.
골품체제에 의하여 억눌려 있던 신라인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모여들 수 있었던 최상의 지역이기도 했다. 청해진 세력의 6효장 가운데 5명은 적어도 이러한 부류에 속하였던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두 곳의 신라인 집단은 단결력이 강한 이주민이었으므로 타국에서의 동족의식이라든가 나라에서는 동향이라는 점에서 유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쉽게 결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장보고는 이와 같은 이 지역들의 특성과 그곳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그의 세력을 키워갈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장보고 세력의 기반은 다른 사병소유자가 형성한 세력과는 구별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결코 청해진 설치 당시까지는 중앙귀족이나 지방세력은 아니었다.
그 세력의 축의 하나는 신라 본국의 재지세력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이탈해 간 세력으로 당 나라에서 해운력을 바탕으로 한 외래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신라 조정으로부터 소외된 서남해안의 해도인들, 곧 노예상인으로부터 약매되어 간 사람들이 그 한 축을 차지한다.
장보고는 이러한 이탈세력과 소외된 자들을 규합하고 결속시켜 그의 세력으로 형성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세력은 다른 어떤 지배세력과도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다. 이러한 이질적인 세력집단을 관장하기 위해서는 신라군제와는 다른 조직체계와 독립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약매를 막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장보고 세력이 아무리 이질적이고 독립적이라 해도 결코 신라 중앙정부로 부터의 완전 이탈은 아니었다. ‘청해진대사’로 임명된 사실은 곧 신라에의 신속을 의미한 것이다. 마치 당 중앙정부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행정적·군사적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던 당 나라 후기의 일부 번진과 같은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뒷날에 ‘감의군사 실봉 2천호’로 봉해진 사실에서도 세력의 독자성은 명백해 진다. 이 때의 분봉은 곧 정치적 혹은 군사적인 독자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의군사’ 라고 하면 바로 당 나라 군제의 ‘절도사’나 ‘감군사’ 등을 연상케 하는 직함이다. 또 뒤에 그에게 주어진 ‘진해장군’이라는 호칭도 매우 중국적이며, 특히 ‘장군’이란 호칭은 뒤에 가서 독립된 호족이나 성주가 자칭하던 명호이기도 했던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장보고 세력의 바탕은 ‘군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그 세력은 군사적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청해진에는 신라의 어떠한 군제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반면에 당 나라 번진의 병제 일부가 원용된 듯한 칭호가 보인다.
곧 ‘대사’와 ‘병마사’가 그것이다. ‘대사’는 이미 논급한 바이지만, ‘병마사’의 경우 청해진에서는 국제무역과 관계된 직책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역에 종사한 사람들이 회역사(廻易使)·매물사(賣物使)의 직함을 쓰고 있지만, 그들의 선단을 총괄한 인물이 ‘병마사’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장보고의 무역선단도 기본적으로는 군사적 조직으로 편제·운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청해진에는 중국 번진의 아군(牙軍)과 같은 친위 상비군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청해진의 성격에 대해서는 무역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설과 군사적인 성격을 강조한 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장보고는 상인, 군인, 정치가라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의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은 당시 시대상황으로 보아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왕조들이 붕괴되어 가는 상황에서 지방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여 해상에서는 많은 해적들이 날뛰고 있었다. 그러므로 무역경영자는 독자적인 무장을 통해 무역의 조건을 스스로 마련하여야만 하였고, 또한 잉여생산물이나 수공업생산자의 대부분이 지배권력층에 집중되어 있는 사회경제구조상 무역품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치권력에 접근하거나 정치세력화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상인인가 아니면 군인, 또는 정치가인가를 둘러싼 논란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된다.
장보고 군진의 군사조직과 직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무역은 병마사를 우두머리로 그 에하에 회역사·매물사가 전담하였을 것이고, 군진은 6효장을 중심으로 군조직이 편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군대를 가리켜 ‘군용이 심히 융성하였다’고 한 표현은 그것이 매우 조직적이고 능동적이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장보고는 완도에 설진하면서 그 인근의 넓은 지역까지도 지배하에 두었지만, 그곳 농업생산에는 의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생산력으로는 수많은 사병을 양성·유지할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경제적 기반은 아무래도 국제무역에서 얻은 동산(動産)이 큰 몫을 차지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해운기술자를 통괄하며, 선박을 소유하고, 원근해의 교역과 운송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보고의 경제력은 무역에서 얻은 동산(動産)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보고 예하에 있으면서 무역에 직접 종사하거나 관련된 신라촌·신라방 사람들의 면모를 보면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해외에다 무역사무소(중국 산동반도의 적산촌과 일본 하카다)를 두고, 압아·총관·촌장을 비롯한 관리와 뛰어난 선원과 우수한 선박을 보유하고, 유능한 통역관을 갖춘 이들 집단이,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군사력의 보호를 받으면서 삼국간을 종횡무진으로 교역한 물량과 얻은 재부(財富)를 생각만 해도 쉽게 긍정이 갈 것이다.
한편 서구 중세봉건사회를 근대사회로 발전시켜 나간 사회계층 가운데의 하나가 원거리 해상무역에 종사하였던 상업자본가세력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국제무역에서 얻은 부의 막대함을 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장보고세력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당의 번진체제에서 그 골격을 따온 군사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장보고선단의 대중국·일본에서의 활약상을 통해 볼 때, 경제적 성격 즉 무역을 통한 이윤확보라는 면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 해적의 소탕과 해상교역 장악 -
장보고 제독의 중요한 업적은 무엇보다도 해상에서나 연해에서 신라인들의 선박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또 신라인들을 납치하여 당나라에다 노예로 팔아먹는 해적들을 황해를 포함한 동북아 전해역에서 말끔히 소탕하여 바다의 평화를 되찾아 놓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해상에서 납치되어 팔려가는 신라인이 더 이상 없게 된 것이다.
통일 신라 말기에 내분으로 국정이 문란하여, 나라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소탕하지 못한 해적으로부터의 민생보호를 실현함으로써, 장보고 제독은 신라인의 긍지를 살렸을 뿐만 아니라, 국제무역의 근간이 되는 해상교통의 안전을 확보케 되었다. 이 점에 관하여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교수는 엔닌의 시대에 동북아 지역에서는 신라사람들이 아직도 바다의 주인들이었다고 하였다.
그때 신라는 제해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가 보다. 소위 씨 레인(Sea Lane)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것으로써 장보고 대사는 당시 동북아 국제해상무역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보고 대사가 직접 국제교역의 주역으로 나서서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라든가 회역사(廻易使)를 당나라나 일본에 파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장보고 대사가 동북아 해상교통의 요충인 완도에다 진을 치고, 황해와 남지나해 및 대한해협을 지나 일본에 이르는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신라의 국제해상 통상진흥을 통하여 나라의 부강에 기여하였음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후대에 두고두고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서나, 장차 중국 및 일본과의 3각 무역을 통한 원대한 통상발전 전망에 비추어 보거나, 또는 머지않아 도래할 소위 서해안시대에 비추어 볼 때에, 완도는 중요한 해상 요충지로서 국제해상교통의 중심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을 기하기 위한 자주적 국토개발 정책의 견지에서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마헨(Capt. Alfred Mahen)이 강조하는 바 씨 파워의 기지로서도 더욱 개발되어야 할 곳이라 하겠다. 청해에 진을 치고 동북아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해적의 소탕에만 멈추지 않고, 장보고 제독은 더 나아가 당나라와의 해상교역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과도 새로 교역을 터서 활발한 해상무역을 발전시킴으로써, 명실공히 자기실력으로 해상왕이 되었다. 라이샤워교수가 그의 역서 「엔닌의 기록」에서 장보고 제독을 ‘한국 무역의 왕자(Korean merchant prince)’라고 표현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당시 신라 사람들이 바다의 주인공들이라고 라이샤워 교수가 한 것은 비단 동북아의 해상교통관계의 중심이 청해진에 있었고, 국제무역의 주도권을 장보고 제독이 관장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말 속에는 신라인들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항해술도 의당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당시 국제 해상교통의 중심지가 청해진 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김상기 박사는 전기 논문에서 일반 신라인들의 해운역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당시 일본 견당사의 중국왕래가 신라통역의 안내와 주선에 의하여 행하게 되었으며, 그들 사행의 선박도 신라선을 많이 충용할 뿐 아니라, 일본 선박에도 신라인 선원들을 고용하였고, 특히 당에 파견하는 사절단에는 다수의 신라선과 해로에 능통한 항법사 60여명을 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일본의 입당 유학승 엔닌과 그 제자들의 중국왕래 및 그들의 통신이 신라 상선에 의하여 행해지게 된 것은 차라리 보통의 일에 속했다 할 것이다”.
당시 신라인의 그같은 해상세력은 전술한 장보고의 활동과 상응할 것으로 믿나니, 이제 그의 관계를 간단히 살펴보면, 유명한 일본의 입당 구법승 엔닌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할 방도에 관하여 장보고의 부하에게 보낸 서신에서 청해진을 경유할 요량으로 장대사에게 그의 사정을 전달하여 달라는 것과 또 선편이 있으면, 자기 일행을 찾아 귀국하게 하여 줄 것을 간청하고 있음을 볼 때, 장보고가 당시 내외국인 사이에 해상 패자로서 공인받게 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엔닌이 당나라에서 일본으로의 귀국선편을 장보고에 간청하는 내용 뿐이지만, 사실은 서기 838년에 엔닌이 당나라로 가는 일본국 사절단 일행을 태운 12척으로 구성된 선단에 편승하여, 처음으로 당나라 산동반도에 도착했을 때에도 동 선단을 일본으로부터 안전하게 당나라 땅까지 갈 수 있도록 배의 길잡이 즉 지금같으면 항법사 30명을 장보고 제독으로부터 지원받아서, 각 선박마다 신라인 항법사 2-3명을 태워, 그들의 지도에 따라 안전항해를 했다는 것을 엔닌은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9세기에 동북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장보고 제독을 미국의 라이샤워 교수는 무역의 왕자, 또는 바다의 지배자로 표현하고, 그 당시 신라 사람들이 바다의 주인공이었음을 분명히 그의 저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라사람들을 바다의 주인이 되게끔 하였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이 항해술이었던 것 같다.이 항해술에 관한 한, 그 당시 일본 사람들이나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신라인들이 우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동북아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우수하였던 것 같다.
그 사례를 미국의 라이샤워 교수의 「엔닌의 당나라 여행(Ennin’s Travels in Tang China)」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한다.
“유럽에 있어서 경제적 성장 및 그에 따른 정치 사회적 변화는 15-16세기 서유럽 사람들에 의하여 재빨리 이룩된 세계의 바다에 대한 제패와, 수세기 동안 이 바다 위에 존재하였던 해상무역에 의하여 촉진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현재 서양의 시작을 그 시기로부터 잡는 것이 옳다. 그러나 널리 세계사적 견지에서는 현대를 당나라 때 세계 무역의 성장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데에도 상당한 정당성이 있을 지 모른다....
엔닌은 우리가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문화를 도입한 첫단계의 중요 시기 중 마지막으로 간 중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중국 대륙에서 만났던 신라 사람들은 이 세계 역사상 하나의 새롭고 보다 더 극적인 단계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지중해 및 기타 비교적 작은 호수를 지배하긴 했으나, 끝없는 대양에 감히 도전하는 것은 오직 천천히 이루어졌을 뿐인 것이다. 일부 한정된 교역이 아시아 대륙의 남해안에서 어느 기간동안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당나라 시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실질적으로 인류의 경제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경제를 통하여 마침내 우리의 정치적 및 사회적 생활까지도 변경시키기 시작할 정도의 해상무역이 성장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엔닌이 서기 845년 산동에서 돌아오기 전에, 비록 장보고와 그의 해운왕국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 3명의 일본 여행자들은 일본으로 돌아갈 귀국 교통편을 거의 전적으로 신라 사람들한테 의존하였다. 그들 일본인들은 적산(赤山)에 있는 마음씨 너그러운 신라 거류민들에게 숙식을 의존하였을 뿐 아니라, 귀국선편까지 기대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항해술 발달에 대한 장보고의 업적은 3국간 국제해상교역 및 동 선박(견당매물선 및 일본에 보내는 회역선 등)관리에 청해진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능히 짐작하고 남는다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장보고 제독이 신라시대의 항해술 발전에 기여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9세기 중반 신라의 항해술은 당시 세계 제일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국의 라이샤워 교수도 세계사적 견지에서 볼때 9세기 경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3국간 국제해상교역이 이 시대의 첨단을 걸었다고 지적하면서, 당시까지도 동북아 바다의 주인공들은 아직 신라 사람들이었다고 적고 있다. 페르시아인들이나 아랍사람들이 최초로 사용했다는 항해용 나침반도 당나라 민간인들 사이에 일부 전승된 것으로부터 발전시킨 것인지도 모른다는 개연성도 라이샤워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해상왕 장보고 제독이 더 오래 살아서 해상교역 뿐 아니라 국가 민족을 위하여 더 기여하지 못하고 신라 문성왕(文聖王) 8년에 뚜렷한 죄없이 암살 당한 후, 그의 부하들마저 반역으로 몰려서 대부분 당나라로 도망가고, 일부는 일본으로 도망쳤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당나라의 해운 능력이란 원래 장보고 제독 산하의 해외 망명 신라인들에 의하여 유지되었거나, 계승 발전된 것이라는 것도 전적으로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잠시 신라 선원들과 일본 선원들의 항해능력에 대한 라이샤워 교수의 비교 논평 내용을 살펴보자.
엔닌의 일기(入唐求法 巡札行記)」나 기타 다른 자료에서 보면, 일본 사람들이 극동의 해상교역에 있어서 신라 사람들과 경쟁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러나 그들 일본인들의 도전은 아직 미약했다. 엔닌이 당나라까지 바다를 건너 갔다가, 일본 배를 타고 산동반도 남해안까지 파행적인 항해를 한 기록을 보건데 귀국시 그를 태운 신라 선박들이 일본까지 8일만에 도착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또 한가지 항해 기술상 당시 신라인들과 일본인들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일본 사절단 간부진들을 안전하게 일본까지 도착시키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기 위하여, 일본 사절단이 60명의 신라인 타수(舵手)와 선원들을 고용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일본 사절단이 당나라로 떠날 때 각 선박에 승선했던 신라인 통역들의 역할이 또한 이 문제에 있어서 감안해야 할 요점이 된다. 이들 신라인 통역들은 당나라 해안에 도착한 뒤의 업무처리에 매우 유용했을 뿐 아니라, 엔닌이 자기 자신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갔던 것을 언급한데서 볼 때, 분명히 이들 신라 통역인들은 해상에서는 최고의 항법 전문가들이었다. 극동에서 신라사람들이 바다를 지배하고 있을 시대도 실제로는 얼마 남아 있지 않았지만 (얼마후에 일어난 장보고 제독의 암살로 말미암아), 그러나 엔닌 시대에는 아직도 신라 사람들이 동북아의 해역에서는 바다의 지배자들이었다.”
장보고와 해상왕국의 몰락
장보고의 해상왕국이 몰락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신무왕의 즉위에 무력을 동원하여 개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결정적 사건은 역시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두 번째 왕비로 들여보내려다가 성사되지 못한 것에 원망을 품고 있다가 염장에게 살해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신무왕의 즉위에 공을 세우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장보고에 대하여, 일부 고위직에 있는 인물들이 중앙 정치 무대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장보고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음모 또한 개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846년(문성왕 8년)에 살해당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신당서』 신라전(新羅傳)에 당 나라와 장보고의 왕래가 841년 이후에 단절되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나, 『속일본후기』의 장보고 사망 연대 및 『입당구법순례행기』 등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장보고는 841년에 염장에게 살해당한 것이 확실하다. 문성왕에게는 본래 박씨 성의 왕비가 있었다. 그런데 장보고는 딸을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들어보내려다 좌절되어 살해되었지만, 위흔(魏昕)이라는 이름도 사용한 김양은 장보고가 죽은 뒤인 842년(문성왕 4년) 3월에 자기의 딸을 국왕의 둘째 왕비로 결혼시켰다.
이 과정에서 아마 김양과 장보고의 알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출신 성분은 미미하지만, 국왕으로부터 진골(眞骨) 귀족급에 해당하는 상당한 예우를 받는 장보고가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딸마저 왕비로 만들려 하자, 중앙 정치 무대에 강력하게 대두하는 장보고의 영향력을 우려한 김양이 염장을 이용하여 장보고를 제거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견해로는 청해진 설치 이후 해상 무역권을 박탈당했던 서남해안 일대의 여러 작은 세력들이, 장보고 딸과 문성왕의 혼인 문제가 발생하자 중앙 세력과 결합하여 장보고를 제거하였을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장보고를 살해한 염장이 본래 청해진 지역을 관할하는 무주 출신이었으며, 신무왕 즉위 이후 공로를 인정받아 무주를 다스리는 두 번째 서열인 주조(州助)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즉 염장 자신도 해상세력 출신이었으나, 장보고의 등장으로 위축되었던 인물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여하튼 딸과 국왕의 혼사 문제로 인하여 장보고가 피살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장보고의 사망과 함께 청해진 해상왕국은 몰락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청해진은 염장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보인다. 이것은 『속일본후기』에 염장이 자신의 부하인 이소정(李少貞)을 일본에 보내어, 장보고 당시 일본으로 가져간 무역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이창진 같은 사람이 염장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장보고 사망 이후 장보고의 추종 세력들은 대부분 제거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예를 들어, 한 때 대당매물사로 활동했던 최훈(崔暈)은 당 나라 연수(漣水)의 신라방으로 망명하였다. 또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청해진 해상왕국은 일시 염장에 의해 관리되었지만, 장보고가 이루어 놓았던 군사적 기반이나 해상 교역망(交易網)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염장 정도의 인물로는 장보고의 뒤를 이어 동북아시아 해상 무역권을 장악해 온 청해진을 관리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염장은 장보고와 같은 거대한 해상왕국을 이루고 유지하기보다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서남해안을 자신의 세력 근거지로 확보하여 이득을 취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신라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국익과는 관계없이 또 하나의 반정부(反政府) 지방 세력이 형성될 가능성을 갖고 있는 셈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중앙 정부는 851년(문성왕 13년) 2월에 청해진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것은 장보고가 염장에게 살해된 지 9년 남짓만의 일이었다. 중앙 정부는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의 주민 집단을 단체로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김제)으로 이주시켰다. 이렇게 특정 지역의 백성들을 단체로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것을 사민(徙民)이라고 한다. 고대 사회에서의 사민은 몇 가지 이유에서 행하여졌다.
첫째는 중요 지역에 소경을 설치하는 경우, 경주 사람들을 그곳으로 옮겨 중앙 고급 문화가 지방으로 전파되게 하기 위하여 사민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는 새로이 영토를 개척하여 통치 영역을 확장하였을 경우, 새로운 땅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정착토록 함으로써 행정적으로 완전히 영역화 하기 위한 사민이 있다. 셋째는 반란을 일으켰을 경우 그곳 사람들을 단체로 생소한 다른 곳으로 옮겨 원래의 거주지에서 갖고 있었던 토착적인 기반을 빼앗아버리기 위한 사민이 있다. 따라서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백성들을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으로 옮긴 것은 세 번째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어떠한 토착적 세력 기반을 박탈하기 위해 신라 중앙 정부가 청해진 백성들을 벽골군으로 옮겼는가 하는 이유에 대하여는 다소 견해의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청해진이 장보고의 세력 근거지였기 때문에, 청해진 백성들을 벽골군으로 옮긴 것은 장보고의 잔여 세력들을 토착 지역에서 분리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청해진을 없애고 백성들을 벽골군으로 옮긴 것은 장보고가 사망한 지 9년이 지나서이다. 장보고의 청해진 해상왕국 세력들을 자신들의 근거지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했다면, 장보고 사망 직후 사민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해진의 해체와 백성들에 대한 사민은 장보고가 사망한 9년 후에 있었다. 또 장보고의 추종 세력들은 이창진처럼 염장을 없애고 청해진 해상왕국을 부활시키려 하다가 죽임을 당했거나, 당 나라나 일본 등지로 망명을 떠났다. 아마 장보고 사망 이후에도 청해진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청해진 해상왕국의 중요 인물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타 내륙 지방의 경우와는 달리, 청해진 해상왕국의 사람들은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장보고의 사망 및 염장의 등장과 동시에 바다를 이용하여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따라서 851년에 청해진을 해체하면서 벽골군으로 사민시킨 대상들은 아마 염장 세력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장보고의 해상왕국 시절부터 청해진에 거주하던 백성들도 일부 벽골군으로 사민되었을 것이지만, 청해진 해체와 사민의 주요 목적은 청해진에 근거하여 점차 세력을 키워가던 염장 집단을 제거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장보고 해상왕국 세력의 힘을 경험해 본 신라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군사·행정 편제에 의해 설치된 여타 군진과는 다른 청해진에서 염장이 점차 세력을 확장할 경우, 장차 장보고와 같은 세력으로 성장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청해진 해체와 벽골군으로의 사민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828년(흥덕왕 3년) 3월 장보고의 건의에 의해 설치되었던 청해진은 851년 2월에 23년의 역사에 종말을 고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838년(민애왕 원년) 12월에 장보고가 김우징을 도와 민애왕에 대한 반기를 들기까지, 거의 11년 동안 장보고는 청해진을 근거로 하여 동북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하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를 잇는 삼각 중개 무역의 중추를 감당하였다. 이 시기가 실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해상 무역을 석권하였던 장보고 해상왕국의 전성기였다. 839년 신무왕의 즉위와 계속되는 문성왕의 즉위로 장보고는 명예와 정치적 입장에서 생애 절정기를 맞았다. 그러나 반대로 이 시기가 바로 청해진 해상왕국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단서가 열린 때였다.
장보고는 841년 11월에 염장에게 피살되었으니 해상왕국을 이룬 지 거의 14년만의 일이었다. 이후 염장에 의해 9년 남짓의 기간 동안 청해진은 존속되었으나, 더 이상 해상왕국의 명성을 유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동북아시아 바다를 석권했던 장보고 해상왕국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었다. 이 기간은 한 때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해상왕국을 건설하였으나, 결국은 지나치게 정치 현실에 깊숙이 개입한 대가로 치러야 했던 청해진 해상왕국의 쓸쓸한 마지막 모습이었다. 정치 논리와 권모술수에 익숙하지 못한 거대 해상왕국이 혼란한 정치 상황의 와중에 휩쓸려 힘찬 파도의 마지막 물거품처럼 사라져 간 것이다.
장보고는 반역자인가?
-필자 : 강봉룡 교수. 목표대학교 역사문화학부
1)장보고에 대한 평가
서남해의 어느 섬 지역에서 태어난 장보고(張保皐)란 소년이 9세기 전반기에 동아시아를 주름잡는 일대 해양 영웅으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는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드라마틱한 소재이다. 그런데 정작 그에 대한 역사 정보는 그의 명성에 비해 너무나도 소략하다. 그의 명성에 비해 너무나도 소략하다. 그의 부모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태어난 시점, 유년시절, 그리고 도당(渡唐)의 시점등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리고 828년에 신라로 돌아올때까지 그가 중국에서 펼쳤던 활동상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아주 적다.
그럼에도 당대 장보고를 만났던 사람들이 남겨놓은 몇몇 기록을 통해서 장보고의 위대성과 인간적 면모를 느껴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먼저 일본의 도당(渡唐) 유학승 엔닌은 장보고에게 편지를 보내(엔닌의 일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게재되어 있음), 한번도 친견하지 못한 장보고가 자신의 구법 활동을 배후에서 도와 준 사실에 크게 감사하면서 한반만이라도 그를 친견했으면 하는 소망을 밝힌 바 있다. 당에서 구법활동중에 장보고와 그 추종자들에게 호의와 환대를 받은 엔닌은 일본에 돌아가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우고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겨 재신(財神)인 적산명신(赤山名神)을 봉제(俸祭)하게 했다. 이는 장보고가 세운 작산 법화원에 오랫동안 머물고 도움을 받으면서 구법순례를 성공리에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고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당의 저명한 시인 두목은 그의「번천문집(樊川文潗)」에 입록(入錄)한 「장보고ㆍ정년전」을 통해서, 장보고와 정년의 관계를 안록산 난 직후의 곽분양(郭汾陽)과 ‘인의지심(仁義之心)이 충만하고 명견(明見)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나라에 한 사람이 있으면 그나라 가 망하지 않는다; 는 어(語)의 잠언을 인용하면서 장보고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두목의 장보고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이후 역사서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예를 들어, 송대(宋代)11세기 중엽 경에 편찬된 「신당서」에서 편찬자의 한 사람인 송기(宋祁)는 장보고에 대한 두목의 평가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장보고에 대한 두목의 평가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장보고에 대한 자신의 논찬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아아 원한이 있어도 서로 봉공함을 저해하지 않고, 국가의 근심을 앞세운 이로는 진나라 때 기해가 있었고, 당나라 때에는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었으니, 누가 이국(夷國)에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김부식 역시 그의 「삼국사기」장보고 열전에서 두목과 송기의 논찬을 그대로 소개하였고, 김유신 열전에서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智略)과 장보고의 의용(義勇)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없어져서 전해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여 을지문덕을 지략의 인물로 평가한 것에 대해 장보고를 의롭고 용기 있는 인물로 평가하면서, 우리사서에서 그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음을 아쉬워하였다.
우리는 이런 장보고에 대한 우호적 펴가에 대해서 유의하면서도, 장보고아 반역을 일으키려다가 신라국왕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다앴다는 사실을 중시하여, ‘반역자 장보고’라는 이미지에 익숙해 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도 ‘과연 그러한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2)암살당한 해양 영웅
장보고는 한국 해양사에서 준무후무한 대역사를 개척한 해양 영웅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이없게도 염장이란 자의 손에 암살당하는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841년의 일이었다. 사서에서는 장보고의 암살을 그의 반란 행위에 대한 신라 왕실의 징벌이라는 시각으로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며 실상은 신라 조정의 음모에 의해서 도살(盜殺)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이제 여기에서 장보고 암살의 경위와 그 성격을 살펴봄으로써, 장보고 암살과 관련된 역사적 진실을 밝혀보자.
장보고의 비극을 불러온 첫 사건은 836년 일어났다. 그 사전의 내막은 대충 이러하다.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흥덕왕은 당제(堂弟)로서 상대등(上大等)의 지위에 있던 김균정(金均貞)이 왕위계승에서 제 1순위자로 EJ올랐다. 균정의 아들 우징(祐懲)은 매서(妹壻)인 예징(禮徵)과 김주원계의 김양(金陽)등과 더불어 균정을 지지했다. 이에 대해 흥덕왕의 아우인 충공(忠供)의 아들로서 당시 시중(侍中)은 매서(媒壻)인 예징(禮徵)과 김주원계의 김양(金陽)등과 더불어 균정을 지지했다. 이에 대해 흥덕왕의 아우인 충공(忠恭)의 아들로서 당시 시중(侍中)의 지위에 있던 김명(金明)은 이홍등을 포섭하여 헌정(憲貞. 균정의 형)의 아들인 제륭(悌隆)을 지지하면서 왕위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양 파벌은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며, 결국 김명이 지지한 제륭이 왕좌에 올라 희강왕(僖康王)이 되었다. 균정은 그 쟁투의 와중에 피살되었고 그의 아들 우징과 그를 지지하던 김양 등은 잔병(殘兵)을 거두어 청해진을 찾아가 장보고의 보호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838년에 중앙에서 상대등 김명은 시중이홍 등과 더불어 정변을 일으켜 자신들이 옹립한 희강왕을 핍박하여 죽게 하고, 자신이 직접 왕위 오르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맨애왕(憫哀王)이 그였다. 이에 대해 우징은 아비와 임금의 원수 민애왕을 토벌할 것을 장보고에게 요청하였고, 장보고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청해진의 구사를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추대하였다. 이가 신무왕(伸珷王)이다. 장보고의 비극은 여기에서 싹이 텄다. 신무왕(혹은 그의 아들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는데, 군신(君臣)들이 이에 반발하여 좌절시켯다. 이에 신라 조정이 장보고의 동향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던중, 무주 출신 염장이 자청하여 장보고를 암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3) 장보고가 왕위쟁탈전에 개입하게 된 동기
여기에서 우리는 장보고의 암살 사건을 장보고의 입장에서 몇 가지 문제를 재음미할 필요가 잇다.
① 장보고가 왕위 쟁탈전에 관여하게 된 동기의 문제 ②納妃를 둘러싼 권력관계의 동향 문제 ③ 장보고가 과연 난을 일으키려 했는가의 문제 등 이 그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역시 ‘당시 장보고가 과연 정치적 야망이 어느 정도였는가’라는 물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먼저장보고가 왕위 쟁탈전에 관여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자. 장보고가 왕위 쟁탈전에 개입하게 된 것은 김명이 희강왕을 핍살(逼殺)한 직후인 838년의 일이었다. 김우징은 김명의 희강왕 핍살 사건에 대해 신하가 임금을 죽인 무도한 행위로지목하고 장보고의 개입을 설득하였던 것이고, 장보고는 이 사건을 불의(不義)한 난으로 간주하고 이를 징벌하는 ‘의로운 일’에의 동참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미 우징은 김명 일파에 패하여 837년에 청해진에 피신해 들어간 이후로 집요하게 장보고의 개입을 설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는 이에 일체의 미동도 보이지 않다가, 신하인 김명 등이 희강왕을 죽이고 와위에 오르는 사건이 터지자 비로소 우징의 설득을 받아들여 난을 평정하는 의로운 일임을 내세워 동참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장보고의 왕위 쟁탈전에의 개입 시점은 그의 정치적 성향을 파악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장보고는 정치적 사건에 가능하면 개입하려 하지 않았을 가능이 크다는 점이다. 만약 그가 정치에 관심이 컸다면, 우징이 청해진에 들어왔을 때 곧바로 그와 결탁해서 행동에 옮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보고의 재당 시절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이유를 대개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장보고는 당에 건너가 서주 무려군의 소장직에 올라서 당 황시에 대항하던 평노치청의 번수 이사도 세력의 소탕전에 참여하면서, 황실에 대항하는 정치적 도전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상한 것인가를 절감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사도 세력을 진압한 직후에 그가 무령군 소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서 새로이 추구했던것은, 재당 신라인사회를 결집해서 이를 정치적 야망 실현에 이용하기보다는 국제 해상무역의 분야에 연결시키고자 했다는 검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귀국 후에 청해진 체제를 건설하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837년에 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들어오면서, 장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정치판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 같다. 즉 838년에 중앙에서 신하가 왕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자, 우징은 장보고의 의분(義憤)에 불을 붙여 참여를 유도했던 것이고, 장보고는 그에 설복당하여 결국 빠져나올 수 없는 정치판에 깊숙이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두목(杜牧)이 평했던 인의지심(仁義之心)이 충만한 그의 성품이 그로 하여 금 의(儀)를 쫓아 정치판으로 쏠리게 했던 반면에, 또 한편의 성품인 ‘명견(明見)’으로도 정치판 개입 이후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예견하지 못했던 셈이다. 바로 여기에 장보고의 비극이 있었다.
4) 장보고 딸의 납비(納妃)를 둘러싼 파워게임
다음에 두 번째의 문제, 장보고의 딸 납비(納妃)를 둘러싼 권력관계의 동향에 관한 문제를 짚어보기로 하자. 장보고 딸의 납비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기사가 전한다. 그 기사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국왕은 장보고 딸을 비(妃)로 맞는 것에 대해 적극성을 띠고 있었던 것에 반해, 군신들은 이를 극력반대하여 저지했다는 점이다. 실제 신무왕은 즉위하자마자 장보고를 감의군사 식실봉이천호(感儀軍使 食實封二千戶)로 삼았고, 문성왕도 역시 즉위하자마자 그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장복(章服)을 하사하였으니, 두부자왕(父子王)은 장보고의 공적에 대해 높이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겠다.
신무왕과 문성왕이 장보고에게 특별한 작호를 내리고 그의 딸을 납비하려 했던 것은, 장보고의 공훈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왕위를 위협하는 권신들의 발호 가능성에 대비해 장보고의 힘을 빌어 왕위를 지키려는 의도도 있었지 않았을까 한다. 실제로 그 직전에 신하 김명이 자신이 추대한 희강왕을 핍살하여 왕위를 찬탈한 사건이 일어난 바 있었으며, 또한 장보고가 거느린 군사력의 위력은 민애왕 김명을 제거하는 과저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왕의 납비 시도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중심 인물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우징을 신무왕으로 추대하는 데 앞장섰던 김양(金陽)이 바로 그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양은 일찍이 흥덕왕 사후에 균정을 추대하려다가 김명 일파에게 패하여 균정의 아들 우징과 함께 청해진에 피신하여 와신상담 기회를 엿보던 중, 838년 장보고의 거병(擧兵)에 힘입어 평동장군(平東將軍)의 군호(軍號)를 띠고서 참전하여 민애왕 김명을 타도하고 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앞정선 자이다. 신무왕과 문성왕에게 김양은 장보고와 더불어 일등공신에 책봉되기에 마땅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무왕과 문성왕은 장보고에 대해서는 특별 작호를 내리고 그의 딸을 납비하고자 하는 등 특별 배려를 하였음에 반해, 김양에게는 어찌된 영문인지 관직을 제수했다는 기사가 일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신무왕과 문성왕이 중앙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김양의 정치적 야망에 대해 장보고의 힘을 빌어 견제하려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김양은 이에 대해 군신(群臣)들을 동원하여 신분의 측미(側微)함을 내세워 장보고 딸의 납비 시도를 두 차례에 걸쳐 좌절시키는 한편, 최대의 정치적 위협 대상 인물인 장보고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을 가능성이 있다. 그 때 마침 염장(閻長)이 장보고 제거의 행동 대장을 자처하고 나서자, 김양이 그를 사주하여 장보고를 암살케 하고, 중앙의 막후 실권자로 부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양이 일찍이 청해진을 관내에 둔 무주(武州)의 도독(都督)을 지낸바 있다는 사실과 염장이 무주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김양이 염장을 사주하여 장보고 암살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5)과연 장보고는 난을 일으켰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장보고가 과연 난을 일으키려 했는가의 문제를 살펴볼 차례이다. 일반적으로 염장에 의한 장보고 제거를, 장보고가 난을 일으켰던가 아니면 난을 일으키려 했던 것에 대한 응징인 것으로 보려는 것이 사서들의 기본적인 기조인 것 같다. 그렇지만 사서들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찾아지고 있는데, 이러한 차이점을 좀더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먼저 「삼국사기」에는 자신의 딸의 납비(納妃)가 좌절되자 장보고가 이를 원망하여 청해진을 근거로 반란을 결행한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 「삼국유사」에는 장보고가 군신(群臣)들의 반대로 딸의 납비가 좌절되자 심하게 불만을 표출하면서 '난을 도모하고자' 했다거나, 혹은 '장차 불충하려 했다' 하여 그가 난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음만을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장보고 딸의 납비를 둘러싼 문제가 국왕과 김양 사이의 파워게임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납비의 관철 여부가 당사자인 장보고와 전혀 무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납비가 좌절되면서 자신을 신임하던 왕권이 크게 위축되고, 김양을 중심으로 신권(臣權)이 부상하는 것에 대해서 장보고가 모종의 대응책을 강구하였을 가능성은 있겠다. 그렇지만 그가 정치적 반란을 모의하거나 결행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조선시대 사서에서는 장보고의 암살을 누명에 의한 억울한 죽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부가 쓴 「동국통감」의 사론에 의하면 ‘도적과 같은 모략’을 받아 억울한 누명을 쓴 것으로 판단하여 두둔하고 있다. 또한 안정복도 동사강목의 사론에서 장보고가 중상모략에 의해 ‘도살(屠殺)된 것으로 단정하고, 장보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김양의 책임론을 펴고 있다.
결국 장보고는 왕위 쟁탈전에 어쩔 수 없이 개입하게 되었고, 또한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자신의 딸 납비 문제가 중앙 정치권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결국 염장의 손에 암사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전락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음모와 술수가 판치던 당시 중앙 정치판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발췌 : 해군지 5ㆍ6월호>
장보고에 대한 재평가(업적)
- 조공무역을 민간자유무역으로 발전시킨 세계 초유의 무역왕
고대 동아시아 국제무역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무역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해상왕 장보고는 청해진을 본거지로 해상물류망을 구축하고 일본 하카다와 중국 적산, 초주, 연수향, 양주, 영파, 광주 등에 신라방, 신라소 등 무역사무소를 설치하여 신라, 당, 일본을 연결, 중계무역을 하는 등 세계 최초로 민간 주도에 의한 글로벌 무역을 실천한 국제 무역왕이며, 세계를 경영한 경제인이었다.
- 한민족 경제 공동체를 이룩한 민족지도자
해상왕 장보고는 당나라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 백제 및 신라 유민을 모아 당의 남측 해안부터 대운하유역과 산동반도 연해에 걸쳐 자치조직인 신라방, 신라소를 설치하여 대중국 물류 중심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재당 신라인과 일본 그리고 통일신라를 한데 묶어 경제 공동체를 이룬 장보고는 위대한 무역가이며 민족의 지도자였다.
- 천년을 내다본 불세출의 전략가
장보고의 중국 대륙 진출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신라인들의 적극성과 진취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장보고 개인은 자기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당나라로 건너갔고, 뛰어난 무예를 기반으로 군인으로 출세했다. 그러나 개인적 성취에 만족하지 않은 장보고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었던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상 무역에 눈을 뜨게 되었고, 신라인들이 이루어 놓았던 산동반도 일대에서의 기반을 근거로 적극적 해상 교역에 뛰어들었다. 여기에는 장보고 개인의 역량이 작용했지만, 그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던 산동반도 지역 신라인 사회의 저력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상 무역을 주도했던 청해진의 설치는 신라인들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 그 시대 동아시아 국제 사회에서 필요한 대외 교류와 해상 무역의 중요성을 파악한 장보고의 역사 인식 및 개인적 능력,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종합적으로 결합하여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산동반도 지역 신라인 사회의 저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해상왕 장보고는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가 서유럽 지중해를 제패하고 상업무역뿐만 아니라 유럽 각 나라의 국제 질서를 주도하기 수세기 전 이미 중국, 일본은 물론 저 멀리 아라비아와의 무역을 통해 해상왕국을 이룩한 국제무역왕이자 해상영웅이다. 그는 탁월한 국제감각을 바탕으로 바다를 부의 원천으로 인식한 선각자였으며, 강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해외 교포의 조직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힘을 한데 모은 훌륭한 민족지도자이기도 하다.
또한 강력한 해양 방위력을 갖추고 운영할 줄 알았던 뛰어난 전략가이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높이 추앙받는 국제적 인물이다. 우리는 해상왕 장보고의 해양개척정신과 국제화시대의 도전정신, 국난시대의 강한 리더십을 이어받아 21세기 이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글로벌 리더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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