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전마마 대관식 모습 ...
♥ 조선시대의 궁녀들(후궁)(1) ♥
오늘부터는 궁녀들에 대하여 알아 볼까요?
그래요
앞으로 3회에 걸처서 화려하지만 어렵게 살아간 궁여들의 삶을 조명해 보기로해요
궁녀들은 화려하면서도 쓸쓸한 여인들 이었지요
조선시대의 궁녀는 왕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결혼을 하지 못 했어요
조선시대 궁궐에 사는 모든 여자는 왕의 여자로서 살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궁녀들 중에서 왕의 선택을 받을 확률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10분의 1 혹은 100분의 1일까요?
아니지요
조선시대 궁녀의 수는 적을때는 300명 정도 였지만 많을때는 700명 이상이었다고 하네요
그 많은 궁녀중에서 왕의 눈에 들어 왕의 잠자리 수청을 들었던 궁녀는 10명도 채 안 되었지요
아무리 불로장생의 명약을 많이 먹는 왕일지라도 몇백명의 궁녀를 모두 책임질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궁녀의 일이 편하지도 않았어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왕실의 예법에 규제된 생활만을 해야 했고
평생을 질시와 투기가 만연해 있는 궁궐안에서만 살아야 했지요
그런데도 조선시대의 일반 평민들의 부모들은 자신의 딸이 왕궁에 들어가기를 희망했었지요
궁녀는 국가에서 강제로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의 의사를 물어서 입궁을 시켰어요
그럼 왜 자신의 딸들을 궁녀로 보내려고 했을까요?
이유는 보릿고개조차 넘기기 힘든 가난 때문이었지요
가난한 백성은 자신의 딸을 궁으로 보내어 얼마안되는 국록이라도 받고
입에 풀칠이라도 하길 바랬던 것이지요
궁녀들은 어릴때는 5-6살 보통은 10살 정도에 궁에 들어갔다 하는데
처음 궁에 들어온 궁녀들은 견습생 신분이었지요
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왕실의 예법과 서법 다도 등을 배우게 되는데
이러한 견습 나인들을 <생각시>이라 불렀어요
견습 나인이 지나면 성년식을 거쳐 정식 궁녀가 되는데 정식 궁녀를 <나인>이라고 했어요
나인이 되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했지요
견습나인들이 나인을 부르는 명칭은 <항아님>이라는 칭호인데
대장금 등 사극에서 이 호칭를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보셨을 거에요
<나인>은 자신의 독립된 방을 가질수 있고 하녀도 둘수 있었는데 나인의 하녀를 <방아이>라고 불렀지요
궁녀들은 봉록을 받지만 그 봉록은 보통 쓸데가 별로 없었다 하네요
순종 때 기록을 보면 궁녀의 봉록이 190원 정도였다 하는데 현재 화폐가치로 약 150-200만원 정도라 하는군요
실제 왕에게 눈도장 받은 궁녀들이 아주 극소수인 것으로 보아 궁녀들은 왕의 여자라기보다는
궁궐안의 사무를 맡아보는 여성 전문직이라고 하는것이 더 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양반집 규수들은 궁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명문가의 딸들은 중전이나 세자빈 같은 높은 위치의 정실부인으로 간택을 받긴했어도
미리 궁궐에 들어가 독수공방하면서 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궁에서 혹시라도 집안의 딸을 데려갈까봐 조혼을 시키는 풍속이 생겨났다 하네요
18세기 영조는 이러한 폐단을 생각해서 조혼 금지령을 내림과 동시에 양가집 규수를 생각시로
모집하지 않기로 했으며 이후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때 조혼금지가 법제화 되었지요
궁녀가 되기 위한 조건은 의외로 힘들고 까다로웠다 하는데 일단 궁녀의 조상들중 죄인이 없어야 하고
집안에 병으로 죽은사람이 없어야 했으며 또 첩의 자식은 절대 안되고
집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어도 무조건 궁녀 선택에서 탈락했다 하는군요
더 중요한 것은 궁녀 선발때 처녀성을 확인하는 절차였어요
왕의 여자가 부정하면 안되기 때문이었지요
이 테스트는 최소 12살 이상의 성숙한 여자에게 실시했는데 앵무새의 피 한방울을 팔에 떨어뜨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고 해서 탈락시키는 방법이었데요
이렇게 어렵게 궁녀가 되었는데 왕의 눈에 드는 궁녀는 몇백에 하나라는 점은 정말 비극이었지요
궁녀들은 성년식을 치를때 결혼식도 함께 했다고 하는데
궁녀의 성년식은 왕의 여자가 성년이 되었다는 것을 축하하는 것으로 이것이 혼례를 의미한다 하는군요
물론 신랑인 왕은 없이 혼자 하는 결혼식이지요
이때 궁녀의 전각에서는 궁녀들에게 사은품을 보내고 궁녀의 부모들은 살림살이를 보내주었지요
이 성년식 즉 결혼식은 모두의 축복을 받는 행사이지만
평생 혼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서글픈 일이기도 했어요
궁녀도 왕실의 예법을 받고 그 위계질서가 뚜렷했으며 보통 생각시로 출발한 10살의 궁녀가
최고 궁녀자리인 상궁까지 오르려면 최소한 40살이 넘어야 됐다 하는군요
궁녀의 삶으로서 가장 높이 올라갈수 있는것은 정 5품의 상궁이지요
특히 상궁 중에서 가장 높은 상궁은 제조상궁인데 제조상궁은 모든 궁녀를 총괄하는 최고상궁을 말함이지요
제조상궁은 모든 내전의 재산을 관리하고 왕의 측근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수 있는 자리였어요
두 번째 높은 상궁은 부제조상궁인데 부제조상궁은
왕의 개인 재산을 관리하고 내전의 창고를 관리 하였지요
또 왕의 심부름을 담당하는 지밀상궁(대령상궁)도 파위가 있는 상궁 이었지요
이 지밀상궁은 왕의 최측근이기 때문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4살 이전에 뽑아 어려서 부터 교육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네요
왕의 자식에게는 교육을 위해 보모상궁을 뽑았고 궁녀들을 감시하기 위한 감찰상궁
또 왕실 가이드 역할을 하는 시녀상궁도 있었지요
궁녀가 궁에 들어가면 먼저 한글로 궁체 쓰기를 익혔는데 어렸을때부터 필수사항이었지요
따라서 궁녀들은 전문적인 서예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 이었어요
궁녀들의 문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남성 문장가들의 문체와는 다르게
우아하면서도 부드러운 필체와 내용이 특징이었다 하네요
인목대비의 궁중비사를 다룬 "계축일기"나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갈등을 다룬 "인현왕후기"는 궁정 문학의 꽃이었다 하는군요
궁녀가 가장 출세하는 길은 왕의 성은을 입어 출세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대부분의 궁녀는 40살 정도에 상궁이 되어 위세를 떨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이것도 일부의 궁녀들만 가능했지요
상궁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기에 대부분의 궁녀들은 그냥 늙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어쩌다 국가에 가뭄이 오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궁녀의 한으로 돌리곤 했어요
유교주의 사회이고 남존여비의 사회인데다가 농업중심의 국가이기 때문에
자연의 재앙을 음양의 조화가 깨진 것으로 해석하여 여자들에게 죄를 전가하는 것이었지요
가뭄이 들거나 국가 재정이 빈약해지면 쫒겨나는 것은 가장 힘없는 나인들이었어요
그렇다고 궁녀들은 이미 왕과 결혼한 몸이었기 때문에 궁밖으로 나온 궁녀는 결혼을 할수도 없었지요
궁에서 행한 성인식 자체가 왕과의결혼식 이었으니까요
조선사회에서 <여성의 재혼을 금지한다>는 사회 윤리상 궁 밖의 궁녀도 평생을 수절해야 했어요
만약 궁녀가 외간 남자와 불륜(?)의 관계였고 현장에서 적발되었다면
이것은 재판없이 참수가 가능했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한가닥 희망은 있었지요
결혼을 못한 노총각이나 상처한 홀아비가 한밤중에 보쌈을 해가면 감지덕지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살았는데 그래서 출궁당한 궁녀들은 방문을 잠그지 않고 잠을잣다 하네요
그럼 여기서 궁녀의 최고자리인 특별상궁과 후궁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해요
최고의 인기드라마 "대장금"에서 연생이는 왕의 승은을 입고 `특별상궁`의 지위에 오르지요
`특별상궁`이라함은, 일반적인 궁녀가 처음 승은을 입었을때 오르는 지위로써
그 위치는 `제조상궁`과 비슷한 위치라 하네요
`제조상궁`은 궁궐의 모든 상궁, 나인을 총괄하는 총체적인 상궁으로써
모든 상궁중에 최고의 상궁이지요
대장금에서 나오는 박정수씨역할이 제조상궁인데 제조상궁은 단 한명으로
지식뿐만 아니라 외모도 출중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러므로 어는날 갑자기 왕의 승은을 입은 연생이는 하루아침에 `제조상궁`과 버금가는
특별상궁이 되었으며 몸종시녀도 2명이상을 거늘일수 있었지요
연생이는 중종의 하룻밤 승은을 입어 `특별상궁`이 되었다가 또다시 합궁을 하여 옹주를 낳고
`숙원(종4품)`의 지위에까지 올랐지요
그럼 내명부의 후궁서열은 어떻게 될까요?
1. 빈 : 정1품, 후궁 중에 최고지위 이지요
2. 귀인 : 종1품
3. 소의 : 정2품
4. 숙의 : 종2품
5. 소용 : 정3품
6. 숙용 : 종3품
7. 소원 : 정4품
8. 숙원 : 종4품
이렇게 후궁의 서열은 8단계로 나뉘어져 있는데
회임을 하여 왕자라도 낳는 날에는 왕의 총애도에 따라 제일 높은 지위에 오르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숙종 때의 명빈박씨는 특별상궁으로 10년을 있다가 왕자를 낳고 `빈`에 올라 '명빈'이 되었지요
꼭, `특별상궁`이 회임을 하지 않아도 `후궁`으로 승격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어요
숙종 때의 그 유명한 `희빈 장씨`는 회임을 하지 않았지만 `숙원`을 거쳐 `소의`에까지 올랐으며
`소의`에서 회임을 하고 왕자를 낳아 `빈` 즉 `희빈`에 오르게 되었지요
중요한것은 품계의 오름은 왕과 중전의 소관이므로 이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유동성으로 작위를 받았다 하네요
엄연한 첩지를 받은 후궁의 첫품계은 `숙원(종4품)`이지요
그러나 `특별상궁`도 크게 보아 `후궁`으로 포함되기도 했어요
`특별상궁`의 직위는 `정5품`이고, `제조상궁`과 같았지요
그렇지만 왕의 총애도에 따라 후궁과 버금가는 대우를 받기도 했지요
여기서 승은에 대하여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면
승은(承恩)의 뜻은
1.임금의 특별한 은혜를 입음.
예)승은이 망극하나이다.
2.(여자가) 임금의 사랑을 받아 동침함 이라 기록되어 있어요
그럼 특별상궁과 후궁의 소생은 누가 키워줄까요?
일반적으로 `특별상궁`이 회임까지 하면 대부분은 그 상태로 두지 않고
정식 후궁으로 첩지를 주고 당을 내리는 등 예우를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만삭의 몸이 되어 출산을 할때쯤이면 대부분 당당한 후궁의 자리에 있는거지요
태어난 아기가 왕자라면 더 높은 품계로 승차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지요
그래서 `후궁`의 지위이지만 그의 소생들은 그를 시중드는 상궁 나인들과 보모상궁이 키웠으며
조정대신에게 부탁하여 훈육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어요
빈과 귀인은 똑같은 1품직위 이지만 관직체계상 정1품 빈이 더높기 때문에
처소의 규모,의복,머리장식, 월봉, 사망시 제수품등에서 많은 차별이 있었지요
하지만 후궁소생 자녀들은 차별없이 아들은 군, 딸은 옹주로 봉해졌지요
무품계는 왕의 직계가족을 말하지요
품계를 갖는다는 것은 이미 '신하'의 신분임을 반증 하는거지요
왕의 가족인 상왕,왕대비,중전(왕비), 세자, 세자빈, 세손, 세손빈, 왕자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는
품계가 없으며
다만 세자의 자녀, 왕자대군,왕자군, 공주,옹주의 배우자는 품계를 갖고 있었다 하네요
이들의 배우자는 왕의 가족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럼 2편에서 만나요 ...
-* 언제나 변함없는 산적:조동렬(일송) *-
*** 왕의 여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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