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충신 엄흥도(朝鮮 忠臣 嚴興道)★
엄흥도(嚴興道)는 영월엄씨(寧越嚴氏) 시조(始祖)인 ' 엄임의(嚴林義) '의 12대 孫으로, 아버지는 엄한서(嚴漢薯)이다. 영월엄씨의 시조 엄임의(嚴林義)는 중국 한(漢)나라의 대학자이었던 엄자릉(嚴子陵)의 후손으로, 唐나라 때 음악을 전파하는 사신인 파락사(坡樂使)로 임명되어 부사(副使) 신경(辛鏡)과 함께 신라로 건너왔다.
그는 고려시절 원외랑(員外郞) 벼슬을 역임하다가 신경(辛鏡)과 함께 산수가 빼어난 영월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정착하였다. 그 후 두 사람은 결의형제를 맺고 '엄임의'는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근처에..그리고 신경은 영흥리 부근에 터를 잡고 후손 대대로 의좋게 살았다. 엄임의(嚴林義)는 영월엄씨(寧越嚴氏)의 始祖이고, 신경(辛鏡)은 영월신씨(寧越辛氏)의 始祖가 된다.
영월의 은행나무
'엄흥도'의 12대 선조(先祖) 엄임의(嚴林義)가 중국에서 귀화하여 뿌리 내린 영월의 은행나무...엄임의가 심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고, 중국에서 귀화하여 이 근처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였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이 나무의 수령(樹齡)은 1,200년으로 龍門寺 은행나무보다 200년 앞선다고... 천연기념물 76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알려져 있다.
정려각 旌閭閣
정려각(旌閭閣) .. 정확한 명칭은 정려(旌閭)이다. '정려'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門)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旌閣)을 세워 표창,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정려(旌閭)를 받는 절차는 그 고을의 관청이나 유학자들 그리고 정려를 받으려는 사람의 후손이 신청하는데 중앙의 예조(禮曺)에서 판단하고, 임금의 명으로 명정(命旌)을 받게 된다. 즉 임금이 命하는 정려(旌閭)란 뜻이다. 한편 국가에서는 세금의 면제나 軍役의 면제 경우에 따라서는 관직이 수여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유교를 통치수단으로 정한 정치가들이 유교의 여러 지켜야 할 항목, 효(孝), 충(忠) 등을 장려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보임으로써 본받게 하여 이상적인 유교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국가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전국에 모두 4,362개의 정려(旌閭)가 있고, 비석으로 된 것이 전체의 45%인 1968개이다. 비석을 세우고 건물을 지은 것이 962개, 건물만 지은 것이 595개, 문으로 된 것이 563개, 나무판에 기록만 있는 것이 268개 등이라고 하며, 건물은 대개 단 칸짜리 이지만, 경북 달성에 있는 현풍곽씨 정려각은 12칸이나 된다.여기에는 고려시대 것이 34개가 포함되어 있는데, 정려(旌閭)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정려각 旌閭閣
정려각(旌閭閣) ..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英祖)의 지시로 세웠다. 원래 영월(寧越) 다른 곳에 있었으나 그 정려각이 허물어질 우려가 있어 1970년에 이 곳으로 옮겨 세웠다. 즉, 단종이 묻혀있는 '장릉'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충신 엄흥도 朝鮮忠臣 嚴興道
조선 6대 임금 단종(端宗)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있다가 영월(寧越) 청령포로 유배를 오게 되었다. 당시 엄흥도는 영월 호장(戶長)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충의(忠義)를 아는 엄흥도는 청령포를 찾아 어린 임금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관풍헌 (觀風軒)
그러던 어느 날 사나흘간이나 장대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면서 단종(端宗)의 유배지인 청령포로 가는 뱃길마저 끊어지는 큰 물난리가 났다. 이에 단종은 청령포에서 영월 동헌(東軒)의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단종은 관풍헌 동쪽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子規詩)를 읊으며
한(恨)을 달랜다
자규시 (子規詩)
일자원금출제궁 一自寃禽出帝宮 한 마리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을 나와
고신척영벽산중 孤身隻影碧山中 짝 잃은 외로운 몸 푸른 산 중에 있네
가면야야면무가 假眠夜夜眠無假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을 이룰 수 없고
궁한년년한불궁 窮恨年年恨不窮 수 없이 해가 지나도 한은 끝이 없어라
성단효잠잔월백 聲斷曉岑殘月白 자규새 소리도 끊긴 뫼엔 달 빛만 희고
혈류춘곡낙화홍 血流春谷落花紅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낙화만 붉었네라
천롱상미문애소 天聾尙未聞哀訴 하늘은 귀가 멀어 슬픈 사연 듣지 못하니
하내수인이독청 何乃愁人耳獨聽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엄흥도(嚴興道)는 이에 답하여 다음과 같은 詩를 지어 단종에게 바친다.
한번 영월에 오시더니 환궁치 못 하시옵고
드디어 흥도(興道)로 하여금 두려운 가운데 돌보시게 하였도다.
작은 벼슬아치 육순에 충성을 다 하고자 하거늘
대왕은 17세의 운이 어찌 그리 궁하신지
높이 뜬 하늘에는 밤마다 마음의 별이 붉고
위태로운 땅에는 해마다 눈물 비(雨)가 붉도다
힘 없는 벼슬아치 의(義)를 붙들고 일어서서
홀로 능히 이 일을 임금께 말씀드리려 하노라.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첩첩산중 영월에서 유배생활을 한지 얼마 안되어 경상도 순흥(順興)에서 금성대군(金城大君)의 단종 복위운동이 발각되었고, 이 때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등은 단종과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릴 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단종은 147년 10월24일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17세의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단종의 영월의 동강에 버려졌으나, 대역죄인(大逆罪人)의 시신(屍身)에 손을 대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세조(世祖)의 위협 때문에 그 누구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 때 '엄흥도'는 영월군수에게 성장(聖裝)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군수(郡守)는 세조(世祖)의 지시가 두려워 거절하고 만다.
이에 엄흥도는 날이 어두워지자 아들 3형제와 함께 미리 준비한 관(棺)을 지게에 지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염습하여 영월엄씨(寧越嚴氏)들의 선산(先山)인 동을지산 (冬乙旨山 ..현재의 장릉 위치)에 몰래 매장하였다. 그가 단종의 시신을 장사지내려 할 때 아들들은 후환이 두려워 간곡히 말렸으나 불의(不義)와 의(義)를 구별할 줄 아는 엄흥도는 ' 옳은 일을 하다가 그 어떠한 화(禍)를 당해도 나는 감수하겠다 '라는 말을 남기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爲 善 被 禍 吾 所 甘 心
엄흥도는 영월의 동강과 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지게에 지고 선산으로 향하였다. 이 때가 음력 10월 하순이므로 동을지산(冬乙旨山)의 푸른 다복솔 가지 위에는 이미 함박눈이 쌓였고, 살을 에이는 듯한 찬 바람이 불어 왔다.
엄흥도는 잠깐 쉴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는데, 언덕 소나무 밑에 숨어있던 노루 한마리가 사람들의 인기척에 놀라 달아났는데 그 자리를 보니 눈이 녹아 있었다.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이 들어잇는 관(棺)을 그 곳에 내려 놓은채 땀을 닦으면서 긴 호흡을 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려 했지만, 관이 얹혀있는 지게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 " 아! 이 곳이 名堂이구나 " 라는 생각에, 노루가 앉아있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였던 것이다.
그 후 엄흥도는 단종이 입고 있던 옷을 가지고 계룡산 동학사(東鶴寺)로 생육신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단(壇)을 쌓고 초혼(招魂)을 부르며 제사를 올린 후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지금도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는 엄흥도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다. 그의 후손들은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먼 곳으로 도망을 간 후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견디면서 살아간다.
엄흥도 기념관
단종이 죽은지 200여년이 지난 현종 9년(1668)에 참판 여필용(呂必容)이 엄흥도의 복호(復戶)를 주청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는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그의 후손들을 벼슬에 등용하였고, 英祖 34년(1758)에는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인 공조참판으로 추증하고,英祖가 친히 제문(祭文)을 내려 사육신과 함께 제향하도록 명하였다.
지금도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와 장릉 경내의 충신각, 문경의 의산서원(義山書院)과 충절사(忠節祠)에는 엄흥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은 英祖 35년(1759)에 그의 고향인 영월로 옮겼으나, 세월이 흘러 정려각이 허물어지자 1970년 지금의 위치인 장릉(莊陵) 안으로 옮겨 세웠다. 엄흥도의 충성과 업적은 실록 등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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