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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西村을 걷다

도솔9812 2013. 7. 24. 13:12

장마의 한복판에서 강원도는 물 폭탄을 맞아 한강둔치는 거대한 호수로 변했고 사방에서 비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오늘의 날씨도 비가 얼마나 뿌릴지 어림잡을 수 없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아 준비한 우산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웠고 내내 구름이 끼어 덥지 않아 산속을 걷는 것이 쾌적하기만 하였다.

오늘 우리가 걸은 동네를 '西村'이라고 한다. 서울에 오래 살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대부가 살았던 북촌과 가난한 선비가 살았던 남촌은 알아도, 서촌이라는 지명은 잘 모른다. 서촌은 청계천 위쪽에 있는 동네라 하여 '웃대'라고도 하고,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어서 '세종마을' 이라고도 한다. 서촌과 웃대는 조선시대부터 부르던 이름이나 세종마을은 근래 붙혀진 이름이다.


18세기 후반 이가환의 <옥계청유첩서>를 보면, 한양도성을 도성의 북쪽 북악산 밑의 ‘북촌’, 남쪽 남산 밑의 ‘남촌’, 동쪽 낙산 밑의 '동촌', 서쪽의 ‘서촌’ 그리고 청계천 장교와 수표교 일대를 ‘중촌’으로 나눠서 분류했다. .


서촌(웃대)는 조선 건국이래 왕족에서 西人으로 다음은 中人마을로 그 후는 소수의 권세가의 거주지로 변화했다.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세우고 세종이 왕조 기틀을 잡을 때까지 경복궁과 맞붙은 서촌은 왕족의 텃밭이었다.


조선시대 중반기부터 서촌에는 중인인 역관(통역사), 의관(의사), 율관(변호사), 음양관(천문학자), 산관(수학자), 화원(화가) 등 요즘으로 치면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이 살았다.

중인은 양반이 아니어서 고위 관직에 나갈 수는 없었지만, 전문 지식과 문화적 소양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들어 한양의 문화 중심이 되었다.


이곳은 인왕산에서 발원해 청계천까지 흘러 들어가는 개천인 백운동천이 있어 경관이 빼어나고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어 유난히 화가와 시인들이 많이 태어나고 거주했다.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인 겸재 정선이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고, 김정희, 정철, 김창흡 등 조선 시대의 예술가들과 이상, 노천명, 윤동주, 이중섭, 박노수, 이상범, 김동짅 등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많은 장르의 예술 중에 화가와 시인이 많이 살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서촌의 경관이 예술가와 궁합이 잘 맞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답사는 종합청사 뒤에 있는 琮沈橋에서 부터 시작했다.
경복궁역 근처 조선시대 종침교라는 다리가 있었고, 이 다리는 인왕산에서 발원해 청계천까지 흘러들어간 백운동천을 1925년 복개할 때 철거됐다. 왕이 서울 경복궁을 나와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러 갈 때 이 다리를 건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를 논의하기 위한 어전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재상이었던 허종(許琮)과 그의 아우 허침(許琛)이 누이의 꾀에 따라 거짓으로 이 다리에서 낙마하여 부상을 입었다는 핑계를 대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뒷날 갑자사화의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일화에서 그 형제의 이름자를 따서 琮沈橋라고 불렀다고 한다. 줄여서 종교(宗橋)라고도 하였으며, 부근의 마을이름은 종침다릿골이라고 불르기도 했다 한다.

 

다음은 길 건너 내수사가 있던 곳을 보았다. 물론 내수사는 언제 헐렸는지 온데 간데 없고 표지석만 남아 있었다. 내수사는 궁중에서 쓰는 미곡·포목·잡화·노비 등 왕실 재정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길을 따라 사직단으로 갔다. 조선 태조는 왕조 상징인 정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을 배치했다.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경복궁 동쪽에 종묘(宗廟),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사직(社稷)’이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직은 풍흉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라를 새로 세우면 가장 먼저 왕가의 선조를 받드는 종묘와 함께 사직단을 지어서 복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에서는 1년에 네 차례 대사와 중사를 지냈고, 그밖에 기곡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종묘는 조상숭배와 유교적 인륜을 기본으로한 정신이고 사직단은 하늘과 땅에 대한 풍작을 기원하고 자연재해 없기를 기원하는 자연존중 과 숭배정신이다. 따라서 종묘사직은 국가를 의미한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전하 종묘사직을 지키시옵서소."라는 대사가 가끔 나온다.

그런데 사직단 뒷편에 이율곡과 신사임당 동상이 있는데 의아했다. 제자리가 아닌듯 싶었다. 동상은 상징물인데 이곳에 연고가 없으니 생뚱맞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종로도서관을 끼고 황학정에 다다랐다.
황학정은 원래 登科亭의 자리였는데 登科亭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이곳에 황학정을 옮겨왔다.

황학정은 경희궁에 있던 왕의 전용 활터에 딸린 정자로 일제강점기 시절 경희궁을 해체해 그곳에 경성중학교(서울중.고)를 지으면서 옮겨온 것이다. 황학정 바로 위 바위에 새겨진 ‘登科亭’이란 각자(刻字)가 눈에 띈다.

조선시대에는 곳곳에 射亭이 있었는데 누상동에 바위에 새겨진 백호정(白虎亭)이란 각자가 있어 우리는 이를 내려오는 길에둘러 보았고,

등과정은 경복궁 서편 인왕산 기슭 옥동(玉洞)에 있던 등용정(登龍亭). 삼청동의 운용정(雲龍亭).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누상동의 풍소정(風嘯亭)과 함께 인왕산 아래 서촌(西村) 오사정(五射亭)이라고 불렸다.

 

육영수 여사를 배출한 배화여고 뒷쪽으로 가니 필운대란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나온다. 이곳은 조선 선조 때의 재상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본관 경주)의 옛 집터다. 원래 권율이 살던 집인데 기상대 근처 성밖으로 이사가면서 이 집을 사위에게 물러 주었다고 한다. 필운은 이항복의 또 하나의 호이며 인왕산을 필운산이라고 불르기도 했다 한다.

필운대 큰 바위에 이항복의 후손(9대손)으로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월성(月城) 이유원(李裕元)이 쓴 것으로 짐작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할아버지 살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더니, 푸른 바위에는 흰구름이 깊이 잠겼다.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전해오니, 옛 어른들의 의관이 지금껏 그 흔적을 남겼구나. (我祖舊居後裔尋, 蒼松石壁白雲深. 遺風不盡百年久, 父老衣冠古亦今)."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어린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던 한음 이덕형은 어디에 살았을까? 그들은 돈독한 우정을 나누며 수 많은 장난과 얄개짓 그리고 해학으로 "오성과 한음'이란 동화와 만화는 청소년의 애독서인데 그렇다면 둘은 한 동네에 살아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동화책을 보면 다섯 살이나 많은 한음이 항상 당하는 아둔한 역활로 나온다. 조사를 해 보니 한음은 고향이 경기도 양평으로 중구 봉래동에서 태어 났고, 오성은 고향이 경기도 파주로 필운동에서 태어 났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둘이 소년시절을 보낸 동네는 지리적을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 이 재미있는 일화들은 그들의 우정이 하두 돈독하니까 전설로 내려오는 야담일 가능성이 높다. 나 혼자 망중한으로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해 본다.

 

등산로를 따라 1km 남짓 올라가 전망대에서 시내를 감상하다가 오른편 계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성동(水聲洞) 계곡은 청계천 발원지로 이름난 곳이다. 세종대왕은 안평대군의 수성동 집에 ‘게으름 없이(匪懈·비해) 왕(형)을 섬기라’는 뜻에서 ‘비해당’이란 당호를 내렸다. 안평대군은 자기 이름처럼 자연과 예술을 즐기는 평온한 삶을 꿈꿨으나 권력싸움에 희생됐다.

갑자기 수성동 물소리가 들렸다. 옥인아파트가 철거되고 계곡 암반이 모습을 드러낸 덕분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수성동 그림이 250년 뒤 계곡 복원 과정에서 구실을 톡톡히 했다. 시멘트에 묻혀 있던 '기린교'도 찾아냈다.

 

인왕동 물길을 따라 때론 굽고 때론 꺾어진 골목을 걸어 내려오다 시인 윤동주가 1941년 한때 하숙하던 집터를 지나서 다다른 곳이 지난 2월 별세한 '한국 미술계 거장' 남정(藍丁) 朴魯壽 화백의 가옥이다.

 

 

 

(현판 "여의륜"의 뜻은 '이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만사가 뜻대로 잘 돌아간다'라는 뜻이라고 하고, 낙관은 "승연노인"이라고 써있는데 이는 추사 김정희의 또 다른 아호라고 한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 옥류동 계곡 일대 약 1만7000평을 차지한 친일파의 거두 윤덕영이 1938년 자신의 딸 부부를 위해 지은 집인데 화가가 무슨 돈으로 이런 거대한 주택을 어떻게 살 수 있었는 지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박 화백이 집과 그림 500점, 수석 369점을 종로구청에 기증하여 곧 일반에 '구립박노수미술관'으로 공개된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재산인데 이의 기증에 동의한 가족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박화백은 2남4녀인데 아들은 카이스트 교수와 한국해양연구원에 다니고 이병헌과 올 가을에 결혼할 탤런트 이민정이 박화백의 외손녀라고 한다. 이민정의 할아버지는 부장판사 출신이라고 한다. 명문가라 할 수 있겠다.


정조치세기인 1786년, 중인계급에서 글을 직업으로 삼는 훈장, 규장각 서리 등의 지식인들이 '玉溪詩社"란 모임을 결성한다. 옥계시사를 주도한 인물 천수경이 살던 집 이름이 松石圓이었고 그들의 주된 모임 장소였다.


사대부는 아니었지만 글을 알았기에 송석원 주인을 비롯한 중인들은 풍광 좋은 이곳에서 시작 활동을 펼쳤다. 모임 이름도 송석원
詩社로 바꿨다.


우리는 어느새 윤덕영이 옥류동 물길 위로 닦아놓은 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여기서 길 위를 자세히 보면 평평한 부분이 보인다. 윤덕영의 벽수산장이 들어앉았던 곳이다. 벽수산장은 윤덕영의 별장이다.

이 별장은 일만 칠천 평의 엄청난 대지에 건평 약 600여 평의 규모로 호화스러운 내부 장식 등으로 인하여‘한양 아방궁阿房宮’, 조선 아방궁’또는‘아방궁’이란 별명이 붙었다.

6·25전쟁 당시 피난민의 목을 적셔주던 '가재우물'이 있던 곳은 어느 집 보일러실이 돼 있었다.


왕족 다음으로 서촌 주인이 된 사람은 권력자 노론의 西人들이다. 바로 안동김씨 경파인 장동김씨들이다. 병자호란 때 충절과 의리의 상징이 된 김상용, 김상헌 형제를 배출한 가문이다.

청풍계 지역은 김상용과 그 후손이, 장동 지역은 김상헌과 그 후손이 살았다. 壯洞은 지금 지명에서 사라졌지만 연원을 살피니 창의문(彰義門) 안쪽을 창의동이라 부르다가 발음이 장의동(壯義洞)으로 바뀌고 다시 장동으로 줄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 날 청운동 일대가 옛 장동 (壯洞)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대신 안동 김씨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형제의 집이 장동이었고 그 후손들이 조금씩 옮기기는 했지만 대대로 살며 조선말기 60년 세도를 누렸기에 안동 김씨를 장동 김씨 (壯洞 金氏)라고도 한다.

청휘각은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이 1680년 영의정이 된 뒤 지은 정자다. 장동 지역의 김수항이 청풍계를 넘어 옥류동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오늘의 답사는 등산일 수도 있고, 과거에의 여행일 수도 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터만 남은 유적이지만 시간의 흔적을 머리 속에서 상상하며 걸었기에 ‘답사’라 해야겠다.

집에 오는 길에 남인수의 '황성 옛터'가 자꾸 뇌리에 떠돈다. 씁쓸하다고 할까, 풍광이 빼어나게 수려한 이곳의 문화유산이 온전히 보전됐더라면 600년 역사의 서울이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도시로 더욱 빛날텐데 아쉽기만하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오노라
아~ 가엽다 이네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여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