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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픔이 서려있는 경희궁

도솔9812 2013. 8. 7. 15:02

 

 

 

 

 

                      역사의 아픔이 서려있는 경희궁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 5대 궁궐은 서울의 보석이다. 외국관광객에게는 서울에 고궁이 있기에 백문이 불여일견으로 그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느끼게 해 주니 한국역사에 대한 이만한 홍보대사가 어디 또 있으랴. 더구나 5대 궁궐을 모두 걸어서 볼 수 있으니 외국인에게는 서울은 잊지 못할 관광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경희궁이 조선조의 궁궐이었다는 것을 아는 서울시민이 얼마나 될까. 대로변에 우뚝 선

<흥화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옛 서울중고등학교 자리, 아니면 서울역사박물관 정도로 알고 있는 중고교생이 더 많을 것이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대궐문이다. 경복궁 문을 광화문, 덕수궁 문을 대한문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경희궁 입구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은 볼거리가 많다. 이 박물관은 우리의 삶과 역사를 같이 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의 발전과정을 되돌아 보며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과정을 잘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와 꿈이 있기에 자라나는 청소년에게는 꼭 보여주어야 할 박물관이다.

경희궁의 규모는 원래 7만2천8백 평으로 지금 남아있는 면적의 3배가 훨씬 땅에 100여 개의 전각이 들어서 있었다. 구세군 자리에는 정문인 '흥화문'이 서 있었고 전면의 문화일보자리는 앞 정원이었고 서울시교육청도 아울러 전각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궁궐의 거의 모든 전각을 헐어버리고 일본인 전용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세웠다.


 

경희궁에는 숭정전(崇政殿)·융복전(隆福殿)·집경당(集慶堂)·흥정당(興政堂)·회상전(會祥殿)·흥화문(與化門) 등의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1829년(순조 29)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燒失)되었으나, 1831년에 중건하였다. 그후 국권피탈 때에는 숭정전·회상전·흥정당·흥화문·황학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이 들어와 숭정전은 1926년 동국대학교 구내로 이전되고, 2년 후에 흥정당은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흥화문은 1832년에 박문사(博文寺)의 산문(山門)으로 이축되었다가 장충동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황학정은 1922년 사직단(社稷壇) 뒤 등과정(登科亭) 터로 이건하였다.

 

1988년 경희궁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흥화문은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이건하고, 숭정전은 새 건물을 지어 복원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경희궁 터 방공호가 서울역사박물관 유물 수장고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경희궁은 광해군이 임진왜란 후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있다하여 이를 빼았아 그 근방에 있는 민가 수천호를 헐게하고 백성과 군사를 동원하여 지은 궁궐로 유사시 본궁을 떠나 피해 있는 이궁(離宮)으로 지어졌다.

경종, 정조, 현종 등 세 임금은 이 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고, 숙종과 경종은 이 곳에서 태어났으며 숙종과 영조 그리고 순조는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따라서 경희궁은 지금은 초라하지만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연회, 사신접대 등 공식행사가 많이 행해진 곳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나라를 물러 받아 불타버린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고 경희궁을 신축하는 등 여러가지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고를 탕진하였다.

 

그리고 이이첨, 정인홍 등 간신배의 농간에 놀아나 국정에 힘쓰지 않고 형인 임해군과 아우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패하는 등 갖가지 실정을 하여 반정으로 쫒겨 났다.

 

하지만 명나라가 누루하치의 후금과의 전쟁에서 파병요청을 하자 도원수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강한 편을 좇으라'라는 밀명을 내리는 등 외교에서는 수완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서적 간행에 힘을 쏟아 '신증동국여지승람' '국조보감'을 편찬했으며 허준의 '동의보감'도 이때 간행되었다.

광해군이 궁궐을 짓는데 국고를 너무 많이 탕진하였다고 하여 반정의 빌미가 되었는데 유럽에 지금 보존되어 있는 관광유산은 주로 왕궁과 성당임을 볼 때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대목이다. 우리나라도 실제로 지금 남아 있는 문화유산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왕궁과 절 밖에 더 있는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광해군이 과연 연산군처럼 반정의 대상이었는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한마디로 이이첨과 정인홍 등 그들의 패거리인 대북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정권싸움의 희생물이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