臨死賦絶命詩(임사부절명시)
(죽음에 임하여 노래한 절명시-成三問-)
擊鼓催人命 (격고최인명)
西風日欲斜 (서풍일욕사)
黃泉無客店 (황천무객점)
今夜宿誰家 (금야숙수가)
울리는 저 북소리 이내 목숨 재촉하는데
서풍에 걸린 해는 뉘엿뉘엿 지려 하네
황천가는 길에는 주막도 없다는데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자고 갈까.
※ 사육신- 성삼문
매죽헌 성삼문은 도총관 성승의 아들이며 성석용의 증손자다.
1456년(세조1년)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탄로나자
유학자로서의 신념과 절의를 위해 목숨까지 버렸던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정권의 변동기에 고고하게 절의에 충실했던 그는
창녕성씨(昌寧成氏)의 정신적 지주로 일컬어지고 있다.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세조는
“나의 녹을 먹는 자가 어찌 반역을 꾸몄느냐”고 물었다.
이 때 매죽헌은 “나으리는 나라를 도둑질했거니와
삼문은 신하된 도리로서 임금이 쫓겨남을 차마 볼 수 없어
옛 임금을 다시 모시고자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성삼문은 세조를 전하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 불렀다.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성삼문의 집안은 멸족의 비운을 겪는다.
그의 아버지 성승과 삼고, 삼빙, 삼성 등 세 아우 그리고
원, 맹첨, 맹평, 맹종과 갓난아기 등 아들들 까지 모두 죽음을 당했다.
<북소리가 이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어,
황천길엔 주막도 없을 것이니
오늘밤은 뉘집 찾아 쉬어갈꺼나>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회두일욕사(回頭日欲斜)
황천무객점(黃泉無客店)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성삼문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지은 이 시는 지금도 숱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성삼문은 1418년 태어나 1456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불과 38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역사상에 남긴 그의 행적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1447년 문과에 장원 급제, 집현전 학자로서
정음청에서 겨레의 자랑인 훈민정음 창제와 음운 연구에 종사했다.
당시 세종은 성삼문을 비롯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최항 등 젊은 학자들을 매우 총애했다.
세종은 또한 그들에게 단종을 잘 보필하도록 부탁했다.
세종의 유언을 받은 이들은 <계유정난>이라는 정권 변동기에
서로 다른 영욕의 길을 가게 된다. 성삼문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 세종의 유명을 상기시키면서 신숙주를 꾸짖은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세조가 가산을 몰수해 보니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의 녹은 한 톨도 손에 대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그의 방에는 거적만이 깔려 있었다.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유명한 성담수는 성삼문과 6촌간이다.
그는 아버지 성희가 단종 복위 사건에 관련되어 심한 고문과 함께
유배를 당한 뒤 돌아와 죽자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 파주에 은거했다.
그 후 조카 성몽정이 경기도 관찰사가 되면서
그의 집을 찾아가 보니 방안에 자리조차 없었다.
몽정이 돌아와 자리를 보냈으나 끝내 거절했다.
성삼문과 성담수는 모두 절의를 위해 고고하게 살다간 사람들의 표상이다.
한편 창녕성씨의 시조 성인보는 고려 때 호장을 지냈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이 시신을 업고 오늘날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에 안장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창녕을 본관으로 삼았다.
호장은 고려 시대의 지방민을 다스리는 호족장이다.
창녕성씨는 호족으로 여러 대에 걸쳐 번창했다.
창녕성씨가 중앙 조정의 관직에 진출,
명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성인보의 아들 성송국 대부터다.
그는 문하시중, 군기감을 역임했다.
창녕성씨의 계보는 성송국의 아들 성공필과 성한필 등 형제 대에서
<노상파(路上派)>와 <노하파(路下派)> 등 2개 파로 갈린다.
길을 가운데 두고 아랫마을과 윗마을에 갈라 살았던데서 계파의 명칭이 유래했다.
그 이후의 분파는 6세조를 파조로 하여 13개 파로 나누어진다.
성씨는 조선 개국 때 성석린, 성석용, 성석연 3형제가 개국에 참여,
고관에 오름으로써 가문의 번창을 가져왔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성씨는 조선조에 138명의 문과 급제자를 낸다.
이중 재상이 5명, 대제학 10명, 청백리 5명 등 숱한 석학과 절신을 배출,
명문의 이름을 떨쳤다.
창녕성씨가 고관대작을 많이 낸 집안으로도 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을 배출하여 절개의 이름난 문중이 된 것이다.
한편 고려의 국운이 기울 무렵 성씨의 문중은 절신 성여완을 배출한다.
그는 공양왕 4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국운이 기울었음을 통탄하고
경기도 포천 주왕산에 은거,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독곡 성석린과 회곡 성석용, 상곡 성석연 등 3형제는 조선 초에
성씨 가문의 번성을 가져온 중추적 인물이다.
3곡(三谷)으로 불린 이들 3형제는 바로 고려 말의 절신 성여완의 아들들이다.
아버지와 아들 3형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간 셈이다.
이들 <삼곡> 집안 중 특히 회곡의 후손에서는 성삼문, 성담수 등 절신이 나왔으며
상곡의 후손에서는 성현, 성혼 등 이름난 학자가 많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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