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아픔이 서려있는 경희궁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 5대 궁궐은 서울의 보석이다. 외국관광객에게는 서울에 고궁이 있기에 백문이 불여일견으로 그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느끼게 해 주니 한국역사에 대한 이만한 홍보대사가 어디 또 있으랴. 더구나 5대 궁궐을 모두 걸어서 볼 수 있으니 외국인에게는 서울은 잊지 못할 관광지가 될 것이다. <흥화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옛 서울중고등학교 자리, 아니면 서울역사박물관 정도로 알고 있는 중고교생이 더 많을 것이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대궐문이다. 경복궁 문을 광화문, 덕수궁 문을 대한문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경희궁에는 숭정전(崇政殿)·융복전(隆福殿)·집경당(集慶堂)·흥정당(興政堂)·회상전(會祥殿)·흥화문(與化門) 등의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1829년(순조 29)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燒失)되었으나, 1831년에 중건하였다. 그후 국권피탈 때에는 숭정전·회상전·흥정당·흥화문·황학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이 들어와 숭정전은 1926년 동국대학교 구내로 이전되고, 2년 후에 흥정당은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흥화문은 1832년에 박문사(博文寺)의 산문(山門)으로 이축되었다가 장충동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황학정은 1922년 사직단(社稷壇) 뒤 등과정(登科亭) 터로 이건하였다.
1988년 경희궁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흥화문은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이건하고, 숭정전은 새 건물을 지어 복원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경희궁 터 방공호가 서울역사박물관 유물 수장고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경희궁은 광해군이 임진왜란 후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있다하여 이를 빼았아 그 근방에 있는 민가 수천호를 헐게하고 백성과 군사를 동원하여 지은 궁궐로 유사시 본궁을 떠나 피해 있는 이궁(離宮)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이이첨, 정인홍 등 간신배의 농간에 놀아나 국정에 힘쓰지 않고 형인 임해군과 아우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패하는 등 갖가지 실정을 하여 반정으로 쫒겨 났다.
하지만 명나라가 누루하치의 후금과의 전쟁에서 파병요청을 하자 도원수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강한 편을 좇으라'라는 밀명을 내리는 등 외교에서는 수완을 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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