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중국의 주장에 대해 한국학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우선 측천무후가 만든 글자 문제인데 한국학자들은 이 글자가 신라에서도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글자는 다라니경보다 5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 정도 시간이면 신라에도 들어와 통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 다라니경의 종이가 신라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제작 연대가 8세기 초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이 경을 쓴 ‘먹’이 신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신라 먹은 질이 아주 좋아
당시 중국에도 수출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주장을 모아 보면 당시 신라는 인쇄술이 발달할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한국학자들은 이때 중국에서 초기 형태의 목판인쇄술이 신라에 들어오자 다라니경 같은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이외에도 서체나 필법을 가지고 이 경의 신라 제작설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도 있는데 너무 전문적이라 여기서는 생략했으면 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검토해야 할 사건이 또 하나 있습니다. 다라니경과 같이 발견된 것인데 ‘석가탑 중수기’라는 문헌이 있습니다. 이것을 2005년에 와서야 박물관 창고에서 재발견하고 부랴부랴 복원해 내용을 확인했더니 뜻밖의 사실들이 밝혀집니다. 이 중수기에 의하면 고려 초인 1038년에 석가탑을 중수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이때 다라니경이 안치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는군요. 그 근거로는, 다라니경 같은 목판 인쇄는 고려 초인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에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8세기에 이런 목판본이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이 중수기가 완전히 판독되어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 다라니경이 석가탑을 처음 만들 때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고려 초인 11세기에 나온 다라니경에 비해 석가탑의 다라니경은 책의 구성이 유치하며 판각술도 훨씬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만일 석가탑을 중수할 때 다라니경을 넣었다면 이때의 수준을 유지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석가탑의 것이 연대가 앞설 수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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