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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도 문화유산이 흐른다

도솔9812 2013. 9. 11. 07:03

 

 

 

                남산에도 문화유산이 흐른다

 

 

조선조 태조는 건국 3년에 경복궁을 짓고 2년후인 1396년 1월에 18km의 도성을 쌓았다.

남산은 조선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도성(都城)의 남쪽에 위치하는 산이라 남산(南山)이라고 불렀다. 본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목멱산이란 옛말의 '마뫼'로 곧 남산이란 뜻이다. 또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불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재위 4년인 1395년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이를 모시는 사당을 목멱신사(木覓神祠)라 하였다. 매년 나라에서 재사를 올리게 되자 목멱신사를 국사당(國師堂)이라고 불렀다. 남산은 북악산(北岳山)·낙산(駱山)·인왕산(仁王山)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하나이며 북악산과는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여러 산과 더불어 왕도의 위곽(圍郭)을 이루어 그 능선을 따라 성벽이 쌓여졌었고, 도성을 에워싸는 방벽은 태조 재위 5년인 1395년에 축성되어 이후로 여러차례 증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남산의 정상에는 5개의 화구를 가진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었고 전국에서 올라오는 중요한 봉화가 서울로 집결되는 곳이었다. 남산은 예로부터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여러 선비들이 거처했고 그들이 지은 누각이 곳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문헌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한양성곽을 축성하는데 12만명이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간을 97구(區)로 나누어 축성구역마다 천자문의 자호를 표시하여 백악산 동쪽 부터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 이르러 조자(弔字)까지 구획하였다.

공사는 매글자 구간 600척을 6등분하여 각 공사구간에 판사(判事), 부사, 판관 등 12명 씩 임명하여 축성책임을 맡겼다.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도명(郡名)을 새겨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내가 답사한 성벽에는 경산, 울산 등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목멱성곽은 경상도에서 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한양 인구가 5만명이었다는데 12만명이나 동원된 것은 어마 어마 한 숫자이다.

더 놀라운 것은 경복궁을 지은지 2년만에 이런 대대적인 공사를 할 수 있었던 국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임진왜란 때 불 탄 경복궁은 270년 만에 재건되었지 않은가. 그것도 재정부족으로 온 백성의 원망을 들으면서 말이다.

아마도 이런 대공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기존의 권문세가가 완전히 붕괴되어 지방토호들이 호신책으로 자신의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거나, 국가에서 몰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전혀 고증이 된 것이 아니고 사극드라마 수준의 내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조선조가 지날수록 성리학을 배경으로 하여 신권이 점점 강화되고 상대적으로 왕권은 약화되어 사전(私田)은 날로 늘어나고 공전(公田)은 줄어들어 세금이 걷이지 않고 그나마 중간에서 착복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국가재정이 고갈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렵게 지은 성곽을 본래의 목적인 국방에 몇번이나 사용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내가 알기로는 한양에 수성전(守城戰)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한양성곽은 그저 힘없는 민초(民草)들의 야간통행금지나 비상시 출입통제수단 등에 사용되었을 뿐이다. 최소한도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 때 한번만이라도 제 구실을 했어야 했다. 왜란과 호란 때 봉수대는 제대로 작동하기나 했는지?

남산은 태종 6년 (1406) 12월 부터 갑오개혁 때 까지 500년간 국방의 중요한 통신수단인 5기의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어 전국의 봉수를 받아 국경이나 해안의 이상 유무를 병조에 보고하였다. 지금은 1기의 봉수대만 전시용으로 복원되어 있는데, 1기의 봉수대는 5개의 봉수가 한 조(組)로 각각 역활을 달리한다.

 

남산에 가면 우리나라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을 많이 만날 수 있는데, 우남 이승만대통령 동상, 백범 김구의 동상, 안중근 의사,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의 동상이 있고 소월시비와 조지훈의 시비가 있다.

 

남산에는 한옥마을이 있는데, 원래 한옥을 옮겨온 것이지만 한번 들러 볼만하다. 한옥마을은 1998년 4월 18일에 개관했는데, 남산골의 제모습 찾기 사업에 의해 조성한 마을로 서울특별시 지정 민속자료 한옥 5개 동을 이전 복원하고 전통정원으로 꾸몄다.

한옥은 변형이 없는 순수한 전통가옥을 선정하였는데 순정효황후 윤씨(순종의 비) 친가는 종로구 옥인동, 서울의 서촌에 있는데 너무 낡아 옮기지 못하고 건축양식 그대로를 본떠 복원하였다.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서울민속자료 24)은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던 것을 이전하였고, 관훈동 민씨 가옥(서울민속자료 18)은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것을, 오위장 김춘영 가옥(서울민속자료 8)은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하였다. 경복궁 중건시 도편수였던 이승업 가옥(서울민속자료 20)은 이승업이 1860년에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하였다.

서울특별시 지역의 사대부 가옥부터 서민 가옥까지 당시의 생활방식을 한자리에 볼 수 있도록 집의 규모와 살았던 사람의 신분에 걸맞은 가구들을 예스럽게 배치하였으며, 전통공예 전시관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관광기념상품이 전시되어 있다.

마을 안의 남산골 전통정원은 남산의 산세를 살려 자연식생인 전통수종을 심었으며, 계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였고 정자, 연못 등을 복원하여 전통양식의 정원으로 꾸몄다.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오늘날의 시민생활과 서울특별시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담은 캡슐을 지하 15m에 수장해 둔 타임캡슐광장이 있다.

여적(餘滴)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한마디 보태고자 한다.
전망대에서 서울도심을 내려다 보니 서울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무심코 바로 밑을 내려다 보니 남산골의 흔적이 있다.이곳을 내려다 보니 불현듯 단구(短軀)의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 교수였던 이희승교수의 수필 "딸각바리"가 생각난다.

살림살이는 비루했지만
정신만은 꼿꼿했던 남산골 선비들은
겨울이오니 땔 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冬至雪霜 삼척냉골에 변변치 못한
이부자리 깔고 누었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도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 몸이 곧아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감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다물고 박박대면서 하는 말이
"요놈, 괘심한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 마는
어디 내년 봄에 보자."

이렇게 남산골 선비들은 인생역전을 위하여 가난을 이겨내며 오로지 과거시험에 매진하였다.

그래에 들어와서도 1960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79불이었고 1964년에는 103불이었으니까 70~80세대는 요즘보다 더 취직자리가 없었고 취직시험 공부환경이 딸깍바리보다 그리 풍족하지 못하였다. 참으로 고생들 많이 했는데 불과 50년만에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으니 지면상으로는 얘기할 수 없고(현금의 정치.사회적 문제) 만감이 오간다.

 

남쪽 산책길을 올라가다 보면 '목멱산방'이라는 찻집이 있다. 건물을 별장같이 지어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데 동동주는 안팔고 차만 판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면 케이블카 타는 곳에 있는 유명한 왕돈까스집에 들리는 것도 추억에 남는다. 남산에는 한쪽에는 장충동 족발집들, 반대쪽 입구에는 왕돈까스집들이 있어 소주파와 데이트족들을 즐겁게 한다.

                                                                                                淸閑 執筆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