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사(三學士)이야기◈
삼학사(三學士)는
1637년 병자호란 때 조선이 중국 청나라에
항복을 하는 것을 반대하고 척화론을 주장했다가
청나라에 잡혀가 참혹한 죽음을 당했던 척화파의 강경론자 세 사람,
즉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일컫는 말이다.
1636년(인조 14) 12월
청태종(淸太宗)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에 침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였을 때, 조정 신하들 사이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을 중심으로 한
주화파(主和派)는 청나라와 화친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김상헌(金尙憲)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主戰派)는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주화파의 주장이 우세를 점하였다.
이에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였고, 홍
익한 등 세 사람은 척화(斥和)의
주모자로 중국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선양에서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척화의 뜻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결국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後金:뒤의 청)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었으나,
후금은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 군량과 병선(兵船)을
요구했고, 1632년에는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고치고 세폐(歲幣)를 늘일 것을 요구했다.
또한 후금은 내몽골을 평정하는 등
세력이 날로 커지자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을 보내어 조선을
속국시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최명길(崔鳴吉)과 같은
주화론자(主和論者)도 있었지만 조선의 분위기는
척화로 기울어져갔고, 윤집·오달제·홍익한 등은 소를 올려
청나라 사신들을 죽여 모독을 씻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 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오달제와 윤집은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섰고, 홍익한은 1637년 2월초 평양에서
회군하는 청군에 잡혀 선양[瀋陽]에 끌려갔다.
이들은 청나라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척화의 대의를 끝까지 밝히다가 모두 선양 성 서문(西門)
밖에서 처형당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문(旌門)을 세웠으며,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 윤집에게는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주었고 모두를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1671년(현종 12)에는
송시열(宋時烈)이 3학사의 행적과 언론을 기록한
<삼학사전〉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