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파정과 석파랑을 다녀와서
나는 가을을 참 좋아한다. 폭염의 여름을 벗어나 선선하다 못해 쾌적한 가을 바람이 불어 오면 내 가슴이 모두 치유되는 것 같은 행복감을 느낀다. 그리고 곧 휘황찬란한 단풍이 내 눈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뒤이어 다가 올 겨울이 나는 두렵지 않다.
꽃 피는 춘 삼월, 녹음이 우거지고 사람을 나신으로 만드는 여름을 지나 국화와 단풍의 계절인 가을 거쳐 겨울로 들어가기 때문에 누릴것 다 누렸다는 포만감으로 담담히 겨울을 마지한다. 교향곡도 4악장이 제일 좋다. 특히 베토벤의 교향곡9번 합창의 코다를 아주 좋아한다.
추석연휴다. 귀성대열에 끼지 않아도 되는 나는, 극장도 좋지만 미술품도 보고 문화유산도 볼 겸 부암동 '서울미술관'을 찾았다. 서울미술관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박찬호 특별전 'The Hero 우리는 모두가 영웅이다'가 기획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천경자, 나혜석, 장욱진 등 서양화가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사실 나의 목적지는 흥선대원군의 별서(別墅)였던 석파정(石坡亭)이다. 석파정은 건물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외부인이 석파정을 보려면 서울미술관 옥상 정원을 통해야 들어 갈 수 있다. 별서란 별장과 비슷하나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집이다.
인왕산 자락 거대한 바위와 아름다운 계곡, 그 속에 그림 같은 정자가 숨어 있는 서울 부암동 석파정은 본래 조선 철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조선말기의 세도가 김흥근의 별장이었다.
이 경치 좋은 별장은 훗날 흥선대원군의 것으로 바뀌게 된다.
대원군은 김흥근에게 이곳을 팔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아들 고종과 함께 이곳을 찾아가 묵었고, ‘임금이 묵은 곳은 신하가 살 수 없다’는 이유에 따라 김흥근은 결국 대원군에게 자기 별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 장면에서 조선이 망하게 된 씨앗이 된 '안동 김씨 세도정치 60년'을 개략적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11세의 순조가 등극한다. 자신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만들어 국구(國舅)가 된 안동(安東) 김씨(金氏) 가문의 김조순(金祖淳)은 '세도정치 60년'의 원조다. 당시 김조순은 임금에게서 권력과 권한을 위임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소위 '세도정치'라는 새로운 권력형태를 만들었다.
세도정치란 본래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말로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큰 도의(道義) 및 도리(道理)를 지닌 정치 지도자'가 유학에서 이상으로 삼는 도학정치를 펼치는 것을 말한다.
곧 조선의 사림(士林)들이 꿈꾼 이상적인 정치형태였다. 역사학자들이나 유학사가들은 세도정치(도학정치)의 대표적인 사례로 '중종(中宗) 때의 조광조, 광해군(光海君) 때의 정인홍, 효종(孝宗) 때의 송시열'을 꼽고 있다.
그러나 김조순 이후, 세도정치는 아주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말로 탈바꿈해 버린다. 김조순은 어린 아들(순조)을 부탁한 정조의 유지를 무기삼아, 순조를 보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정의 주요 요직을 자신의 가문인 안동 김씨로 가득 채워 버렸다.
국왕의 뜻을 받들어 뚜렷한 이념과 정책을 내걸고 정치를 한 조광조나 정인홍의 세도정치와는 전혀 다르게, 김조순은 국왕의 유지를 무기삼아 자신의 일족(一族)이 권력을 장악하고 독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 일족이 조정의 주요 요직을 독점하고 권력을 장악하자, 국가 정책 및 인사에 관한 결정권한은 국왕과 조정이 아닌 김씨 일문(金氏一門)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더욱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국가의 공식적인 법과 행정집행체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도록 마비시켜 버렸다.
이로 인해 안동 김씨 일가와 관련된 매관매직과 부정부패 및 비리혐의가 끊이질 않고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지방 관리들의 백성에 대한 수탈행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 순조 시대에 유난히 대규모 민란(民亂)이 잦았던 이유는 순전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낳은 폐해 때문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순조 뒤에 임금에 오른 헌종은 안동 김씨를 소외시키고 풍양 조씨를 중용했는데, 헌종은 후사(後嗣)를 보지 못하고 재위 14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헌종의 재위 기간 내내 권력의 핵심 무대에서 밀려나 있던 안동 김씨는 당시 왕실(王室)의 가장 웃어른이었던 순원왕후(김조순의 딸)를 중심으로 재빠르게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골라 왕의 자리에 앉혔다. 김조순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김흥근, 김수근, 김좌근, 김조근, 김문근들이다.
헌종에게는 6촌 이내의 친척이 없었다. 그래서 안동 김씨는 헌종의 7촌 아저씨가 되는 강화도의 농사꾼 이원범(李元範)을 찾아내 반 억지로 임금을 만들었다. 이 임금이 바로 조선의 제25대 임금인 강화도령 철종(哲宗)이다
철종을 임금의 자리에 앉힌 안동 김씨는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집안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김문근은 김조순에 이어 안동 김씨의 제2차 세도정치의 주역이 된다. 김병학, 김병국, 김병기 등은 김문근의 아들들이다.
그 후 안동 김씨는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조그마한 씨앗도 자라나지 못하도록 '피의 청소'를 시작했다.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조선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왕족(王族)들이었다. 상갓집 개라고 불리는 흥선군 이하응을 제외한 이하전 등 왕족들을 역모로 사사한다.
그러나 이른바 조대비(趙大妃)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신정왕후(神貞王后 : 헌종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한 풍양 조씨는 철종 역시 후사(後嗣)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안동 김씨의 세도권력을 일거에 붕괴시키는 대반격을 가한다. 조대비(趙大妃 :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연합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끝장내는 계획을 세운다.
즉, 이하응의 아들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기로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숨 가쁜 권력투쟁의 와중에 임금이 된 사람이 당시 12살 어린아이였던 고종(高宗)이다.
그러나 고종의 등극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를 부활시키고자 한 조대비(신정왕후)의 의도와는 달리,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양 가문의 세도정치를 몰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섭정(攝政)의 자리에 오른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씨 일가를 숙청하는 한편 세도정치의 발원지인 외척세력을 철저하게 응징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순조 시대부터 철종 때까지 3대 60여 년 간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권력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석파정은 김흥근(金興根)의 별서였는데, 김조순은 김흥근의 당숙이다. 영의정 김홍근의 동생이기도 하고 유명한 김창집의 5대손이다.
김흥근은 헌종 때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안동 김씨의 세도를 배경으로 방자한 행동이 많았으므로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철종 때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의 별장을 탐냈던 흥선군이 대원군이 된 후, 별장을 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자,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을 데리고 그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묵어갔다고 한다. 임금이 머문 곳을 사저로 쓸 수 없다는 관례때문에 김흥근은 별장을 흥선대원군에게 헌납하였다.
김흥근의 별서를 반강제로 압수한 흥선대원군은 별서 이름을 석파정이라 바꾸고 자신의 별서로 사용하였다.
이 집을 석파정이라고 한 것은 정자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대원군이 석파(石坡)라고 이름지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아호를 석파라고 한 것도 이로 인하여 지어진 별호이다.
석파정은 조선 왕조가 망한 뒤 심한 운명의 부침을 겪었다.
소유권이 왕족인 이희(李喜)→이준(李埈)→이우(李堣) 등으로 세습되어오다가 6·25 직후 고아원·병원 등으로 쓰이다가 민간 소유가 됐고, 자주 경매에 나와 여러 차례 임자가 바뀌면서 오랫동안 문이 닫혀 있었다.
그 터를 유니온약품 안병광회장이 65억원에 매입,미술관을 지어(서울미술관)소장품 이중섭의 황소(경매에서 35억6천만원에 구입)등 미술품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석파정은 미술관 옥상 정원을 통하여 출입할 수 있으며,한옥 7개동 중 4개동이 남아있다. 이렇게 석파정은 미술관 옷을 입은 셈이며 석파정 건물은 복원된 것이다.
'서울미술관'은 전시 공간이 모두 500평으로, 국내 사립미술관으로는 삼성미술관 리움 다음으로 큰 규모다.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술애호가인 안병광 회장은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출발해 연 매출 3000억원에 육박하는 의약품 유통업체 유니온약품그룹을 일으킨 기업가다. 작품 값이 비싼 화가로 꼽히는 이중섭의 그림만 30여점을 모은 컬렉터인데, 그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이중섭의 대표작 <황소>였다.
1983년 제약회사 영업사원 시절 명동의 한 액자가게 처마 아래에서 잠시 비를 피하던 그는 창밖에서 이중섭의 <황소>를 인쇄한 그림을 보고 가게에 들어가 복제 프린트 그림을 샀다.
그리고 아내에게 선물로 주면서 “언젠가 진짜 황소 그림을 선물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안 회장은 수십년 뒤 그 꿈을 이뤘고, 2006년 석파정을 인수해 대형 미술관까지 세웠다.
서울미술관은 문화재인 조선 시대 전통 가옥들과 인왕산의 빼어난 풍광, 그리고 현대식 미술관이 어우러지는 보기 드문 미술 공간이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그윽한 숲과 아름다운 정원이 조화를 이루고, 숲길 곳곳에 중국풍 정자와 기암괴석, 계곡이 이어진다.
뜰에는 해묵은 노송(老松)들이 차일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서쪽 바위산에서 흘러내린 계류(溪流) 한가운데에는 평대(平臺)를 쌓고 그 위에 서양식 건축기법이 더해진 유수중관풍루를 세웠다. 4모지붕이나 기와를 씌우지 않은 색다른 지붕을 하고 있다.
다음으로 석파랑(石坡廊)을 살펴 보기로 한다.
석파랑은 6·25전쟁 직후 석파정이 ‘콜롬비아 고아원’으로 이용될 당시 멸실 위기에 처했던 석파정의 사랑채를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지금의 홍지동으로 이전한 것이 그 뿌리이다. 그가 1944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인 동양철학자 후지츠카로 부터 가져온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당시 손재형 선생은 석파정 사랑채와 경복궁에서 옮겨온 만세문, 순종왕후 윤씨의 생가, 조선후기 기생 나합의 집 등 서울 시내에 흩어져 있던 조선 후기 건축물들을 옮겨와 새 집을 지었고, 이후 1974년 석파랑 사랑채에 해당하는 부분이 등 흩어져 있던 조선후기 건축물들을 옮겨와 새집을 지었고,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석파랑은 석파정에서 온 사랑채와 순종왕후 윤씨의 생가 등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으며, 덕수궁 돌담 일부도 이곳으로 옮겨져 담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1989년 김주원 씨가 석파랑을 매입해 94년부터 전통 한식당으로 운영해 오고 있는데,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한번은 가 봐야할 곳'으로 손꼽는다. 뛰어난 식당 풍경과 한정식 등 요리가 유명해 단골이 많고 상견례 자리나 돌잔치 자리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식사대가 만만치 않다. 1인당 점심이 55,000원~110,000원, 저녁이 95,000원~155,000원, 전통주 한병 75,000이다. 여기 저기서 비명 또는 한탄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 이심전심으로 실려 오네요~.
궁중음식과 반가의 음식이 섞였고 한정식 스타일로 제공된다. 쇠고기 요리와 구절판의 형식이 독특하고 후식도 화려하다. 기명(器皿, 그릇류)이나 실내외 공간도 눈여겨볼 만하다.
석파랑은 대원군이 사용한 큰 방과, 손님 접대공간인 작은 방, 난초를 그릴 때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대청방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淸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