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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편 호도협 장씨객잔, 중도협, 여강

도솔9812 2014. 1. 21. 11:06

제 3편 호도협 장씨객잔, 중도협, 여강

  2013년 10월 05일

  아침에 일어나 새벽 아침 여명에 희망을 걸어 보았지만, 하늘은 과연 맑게 개었을까? 옥룡설산의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들어 내였을까? 기대를 걸어본다.

 

  건너편 옥룡설산을 바라보니 봉우리가 보일락 말락 구름에 휩싸이고 도무지 앞은 가늠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가 높아서인지 공기는 건조하여 기분은 상쾌하였다.

                               중도객잔 새벽 구름 둘러쌓인 옥룡설산

 

   새벽녘 부드러운 바람결이 좋다. 뺨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스치는 바람이 시원하다.

옥룡설산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바람이 좋아서 눈을 감고 한 참을 서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도 구름 사이로 가리어진 산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실로 오랜만이다. 자연의 미묘한 변화를 온 몸으로 느껴 본 것이 생활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보다 편리하게 해주었던 온갖 것들을 조금 멀리 떠나왔을 뿐인데, 마음이 한결 차분하고 맑아진 기분이다.

영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의 에너지가 충전된 것처럼 상쾌하다. 이쯤이면 충분하다.

 

  아침 식사는 어제 닭백숙에 흰 쌀죽 과 화덕에 구운 밀가루 빵을 내오는데 소스는 없이 나와서 구운 빵과 흰 쌀죽으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중도객잔을 뒤로하고 장씨객잔으로

 

  일정에 의한 오늘의 오전 목적지인 호도협 중에서 가장 계곡이 좁다고 하는 사냥 군에 쫓기어 바위를 밝고 뛰어 넘었다고 하는 중호도협 으로 향하여 08시 30분에 출발 하였다.

 

  우리들은 중도객잔을 뒤로 하고 계단식 밭이 산허리까지 잘 조성 되어 있고 마을은 이 깊은 골짜기 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호도협은 실크로드 보다 오래된 운남성의 차를 싣고 금사강 상류를 따라 티벳으로 가던 마방들의 차마고도 옛길이다.

인도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의 충돌이 만들어낸 옥룡설산과 하바설산 사이의 깊고 거대한 협곡으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계곡중의 하나인 호도협의 중호도협 길을 따라 가다보면,

              물에 흘러온 우라늄 광석을 걸러내 채취하는 작업대

 

     석회석 채광하여 물과 혼합하여 흘러 보내는 고랑(폭포)

  산 위에서 우라늄을 채석 하여 곱게 갈린 가루를 물에 흘려보내면 이곳 낭떠러지에 사금 채취하는 형식(동판에 수은을 발라 놓고 그 위로 사금 채취한 돌가루를 물과 함께 흘러 보낸다)의 방법으로 우라늄 걸러내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걷다 보면 이름 모를 작은 고랑(폭포)에서는 회색 빛 물이 계속 내려오는데 이 물은 산 위에서 석회석을 채광 하여 물에 흘려보내는 것으로 아래에서 물과 석회석을 분리 작업 하여 석회석을 만든다고 한다.

 

  위험한 계곡의 낭떠러지 길을 일열 종대로 서서 조심 있게

                         낭떠러지 위험한 길

30여분 걷다 보면 호도협 트래킹 코스의 유명한 관음 폭포가 장관을 연출한다.

 

비록 수량은 적었지만 떨어지는 폭포수의 시원한 물줄기의 장관은 아름다웠지만 물이 길을 점령 하고 흘러 내려서 조심조 심 발을 디디며 건너가야 한다.

 

                 호도협 트래킹에서 유명한 관음 폭포

  그 아름다움에 취에 렌즈로 잡은 포커스는 대 자연의 아름다움을 기계적인 구도로 담을 수 없음에 탄식을 금치 못한다.

 

아무리 잘 포커스를 잘 맞추려 해도 눈으로 보는 환희의 절정을 표현 할 수 없음이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대 자연의 비밀을 가슴에 담을 수 있음이 트레커 들에게 주어지는 감동적 선물이다.

 

    주변 경관을 보며 명상하고 사진도 찍고 쉬어가기 좋은 장소

  대부분 이 지역 물들이 석회질이 가득한 것에 비해 이 관음폭포의 물은 아주 수질이 좋아서 폭포 물 만큼은 맑고 깨끗하여서 이곳 주민 나시족의 급수 원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그 옛날 마방들이 이곳을 통해 교역하기 위하여 고단한 삶이 느껴지는 길이기도 하다.

 

옥룡설산 배경으로 오른쪽 수 백 미터 절벽 위에서 사위 모습

  이곳을 지나면 산 모서리의 바위를 파서 만들어진 이 바위길, 절벽 길을 걸으면서 그 팍팍 했던 그 마방들의 고단한 인생길이었는데, 이곳에서의 주변 경관을 보면서 명상 여행하기 아주 좋은 장소로서 한 번 쯤 사진도 찍을 겸 하여 쉬어 감을 권하고 싶은 장소 이다.

 

 

  오른 쪽은 수백 미터 절벽이요, 왼쪽은 가파르기 그지없는 절벽으로 우리네 인생이 겪어내는 여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저 가파른 길을 걸으면서 나는 그 동안 나를 알게 모르게 짓누르고 있던 이 모든 것을 지켜 낼 수 있음에 앞으로의 삶,  건강하고 즐거워야 함을 알게 된다.

              구름에 쌓인 옥룡설산의 부드러운 이미지

             차나스객잔 방향표시

숨이 막히도록 아찔한 저 절벽을 걷는 기분은 어떨까? 괜스레 도전 의식이 새롭게 꿈틀거린다.

 

 

  건너편의 옥룡설산 중, 하부에 도톰한 나무 들이 상부에서 흘러내린 물을 흡수하고 안개 서린 빛을 받아서 부드러운 이미지를 엮어 낸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이름 없는 작은 폭포가 우리의 가는 길을 막고, 풍광이 좋은 곳도 있어 이것저것 보면서 걷는 걸음이 늦어지게 한 후에 어느 정도 걷다 보면 내리막길에 들어서게 되는데,

비탈면에 이름 모를 꽃들이 입술이 촉촉이 젖은 각양각색의 모양들로 가을을 재촉하는 바람에 흔들리며 손짓으로 우리들을 유혹하여 취하게 하니 정신이 빠져서 14 ~ 150㎜ 렌즈를 대기가 바쁘고,

 

  내리막길을 걷다보니 삼거리 갈래 길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이정표를 잘 보고 걸어야 된다,

                      우리들을 유혹하는 요정들

 

잘못하면 치나스객잔 으로 가게 된다. 이곳을 지나 내리막길로 내려가게 되면 어느덧 포장도로에 접하게 되어 주변 경관에 온통 구름이 산야를 가리고 있으나 그래도 풍광은 나무랄 데가 없다.

          포장도로 접하는 경관 좋은 장소

이곳에서 불과 3 ~ 4분 정도 걸으면 장씨성을 가진 객장(해발 2,000m)에 1시간 45분여 만에 도착하게 된다.

 

 

                      장씨 객잔

  이 객잔에서 짐을 보관하고 중요물품과 사진기만 가지고 10시 20분에 협곡이 좁은 중호도협으로 90도 가까운 위험한 절벽 길을 조심스레 내려가는 험한 트레킹이다.

 

급경사로 된 내리막은 아슬아슬한 험로인데 보이는 경치가 절경을 이룬다. 내려가다 보면 나시족이 관광객을 상대로 음료수와 과자, 과일 등을 파는 곳이 있고,

                       중호도협 호랑이가 사냥꾼에 쫓기어 뛰어 넘었다는 바위

 

                    산허리 돌을 파서 만들어진 길

  검푸른 협곡 아래 계곡의 세찬 물보라가 커다란 굉음과 함께 호도협에 메아리친다. 중호도협은 북쪽으로 흐르는 계곡의 중간에 위치한 바위섬이다. 호도협이란 말은 호랑이가 사냥꾼에 몰려 협곡을 뛸 때 디딤돌로 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협곡의 사방 경치가 절벽과 어우러진 절경을 이루는 경치를 보면서 절벽 길을 거의 다 내려와서는 산허리 돌을 파서 만들어진 길을 지나서 좌측 위를 보면 합파설산의 계곡 중턱을 지나는 교량의 아치 모양이 하늘에 걸린 양 아슬아슬한 협곡에 대 장관이 펼쳐진다.

                             하바설산 연결 다리 아래 이름 없는 폭포

 

  협곡의 사방 경치가 절벽과 어울려 장관인 데다 이름 없는 폭포의 급류로 흐르는 협곡의 물살은 세차고 거세며 협곡의 조화가 대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 장관이며,

이 물 소리와 중호도협의 금사강에서 흐르는 흙탕물의 수량이 많아서 마치 제트기 굉음처럼 웅장한 물소리 들으며,

 

  이곳에서 잠시 발을 멈추고 너도 나도 사진작가 되었기 때문에 엑스트라 모델은 왜 이렇게 많은지 한참을 서서 볼거리를 보고 가는 것도 이곳을 떠난 후에 아마 가슴에 새기고 머리에 그려질 것 갔다.

 

  여기서 오늘의 트레킹 최종 목적지인 중호도협 바위 까지는 몇 걸음만 걸으면 35분 여 만에 바로 중호도협(해발 1,500m)이다.

가까이에서 금사강의 흙탕물이 흘러가는 소리는 제트기가 폭음을 내며 날아가는 소리와 같다고 하면 맞을 것 같다.

꽤 소리가 크고 웅장하며 흘러가는 물줄기가 바닷가의 파도처럼 출렁이며 흘러가는 광경을 너나 할 것 없이 전부가 사진작가여서 사진 찍기가 분주 하다.

 

물소리

http://blog.naver.com/9812yoon/40205699338

http://blog.daum.net/ykk9812/6991871

 

  이곳의 관광을 마치고 흘러가는 물소리를 뒤로 하고 장씨성객잔으로 올라가는데(11시 20분경) 내려올 때는 조심 하면서 내려오기 때문에 어려운줄 몰랐으나 올라갈 때는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것 같다.

 

         협곡중에서 제일 좁은 중호도협의 세찬 흙탕물

  여기서 내가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자기 몫의 산행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 몫을 아무도 대신 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력의 한계를 느껴도 걸어야 한다. 힘들어도 올라가야만 한다.

천리 길이 한걸음에서 시작 되듯 만 리 길도 한발 한발 걷는 결과일 뿐이므로 인생길도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 지나온 길을 생각 하며 옆에서는 든든한 사위가 나를 무언의 독려에 힘입어 이번 트래킹의 최종 목적지인 장씨성객장에 40분 여 만에 도착하니 먼저 온 일행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우리와 50대 초반의 부부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상추를 비롯한 돼지고기 제육볶음, 석이버섯볶음, 야채볶음, 토마토 등 여러 가지 찬이 있었으나,

사위가 가지고온 고추장 하고 날아가는 안남미 쌀밥과 고추장을 찍어서 먹는 상추 쌈밥의 맛이 외국이라 그런지 일행 모두가 맛있게 잘 먹는데,

나는 중호도협에서 40여분 만에 올라오는데 힘이 들어서 그런지 밥맛을 모르겠고 하여 토마토만으로 간단히 요기를 채웠다.

         칸막이는 설치되어 있으나 문이 없는 화장실

 

  12시 10분경부터 우리들의 천적인 비가 오기 시작 하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빵차가 오기를 잠시 기다리는 중에 화장실에 가보니 중국의 화장실 문화가 2000년도 곡부에 관광 갔을 당시의 공중 화장실은 칸막이 없이 되어 있었으나 2011년도에 들어와서는 그나마 좀 나아졌다고 하는 것이 칸막이는 되어 있으나 문이 하나도 없는 화장실,

그래도 여전히 아직도 개선이 시급한 문제이다.

 

  그리고 모든 화장실에는 사용료를 징수하고 있으며 심지어 객잔의 화장실에도 객잔의 손님이 아니면 사용료를 내라고 한다.

중국에서의 화장실 용무가 있으면 한국의 화장실이 그립다 그리워........

 

  12시 40분경에 빵차 2대가 와서 차당 8명씩 나누어 승차하고 일출소우로 향하여 가파른

               노견이 없는 낭떠러지 내리막 2차선 도로

낭떠러지 내리막길 2차선을 우중에 달리는데 시속은 불과 4 ~ 50㎞/h 인데도 도로가 좁아서 그런지 속도감이 있고 왼쪽으로는 급경사의 낭떠러지 밑에는 금사강이 흙탕물이 흐르고,

 

커브를 돌 적마다 가슴이 출렁이며,

 

             백수대경구의 호도협 상징탑인 호랑이 상

  어떤 곳은 도로가 유실 되어서 1차선으로만 다니고 있는 곳을 지나 20분여 내려오니 일명 백수대경구로 호도협 상징탑(호랑이 탑)이 눈에 들어오는데,

 

호랑이가 뛰어 넘을 수 있는 정도로 좁은 협곡이라는 의미에서 호도협이라 하는데 이곳은 꽤 넓은 지역이다.

주차장에는 승용차를 비롯한 관광차가 많이 있었으나 그 광장에는 사람은 안내원만 보이고 관광객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강 건너편에 관광지가 있는지 모든 관광객들이 강을 건너서 가고 있었다.(-사진 Daum 인터넷에서-)

 

  즉 상 호도협 입구에는 호랑이가 강을 건너다고 하여서 호랑이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이곳을 지나 일출소우에 1시 05분경에 도착하니 비는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호도협 트레킹을 무사히 마치고 나른한 몸으로 우리 일행은 대기 중인 관광버스에 승차 하여 오늘의 도착지인 여강으로 향하였다.

  

  가이드의 일장 연설......

  여러분의 협조아래 무사히 트래킹을 완주하게 돼서 고맙습니다.

우리 다 같이 박수........

 

  여강으로 2시간 반 이동 합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중간에 한번 휴식 하고 앞으로의 일정은 2시간 반 뒤에 여강 고성으로 들어갑니다.

여강 고성을 구경하고 고성 안에서 카페 거리 식당에서 한식으로 식사하고 호텔로 이동하여 맡겨둔 짐을 찾고 방으로 투숙하면 되겠습니다.

 

  호텔에서 고성하고 가깝기 때문에 몸을 씻고 나서 고성 한 바퀴 돌아보아도 되고 호텔 주변에 포장마차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포장마차에서 많이 드시지 마시고,

내일을 위하여,

내일 아침 모닝콜은 05시 30분에 하고,

식사는 06시 30분에 하는데 모든 짐을 가지고 나와서 식사하고 나서 바로 07시 출발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저녁에 미리 다 준비하여야 합니다.

 

  내일 일정에 대해서는 옥주경천에 도착하여 말을 타고 약 3시간 이동하는데 중간 중간 휴식을 하는데 내려서 걸어서 5여 분간 이동하거나,

또는 내려서 10여 분간 이동하거나 해서 휴식 하는 곳이 있습니다. 

 

  말 타는 시점이 해발 2,800m에서 말을 타고 3시간 이동하고 해발 4,000m에 도착 한 다음에 식사를 하고 나서 바로 출발 하는데,

식사는 올라 갈 때 한 번,

내려와서 한번,

두 번을 드시게 되는데,

왜 그러냐 하면 올라 갈 때 한꺼번에  많이 드시게 되면 해발 높은 곳에 따라서 소화가 잘 안되어서 등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4,000m의 전죽림에서 부터 시작하여 등반 하는데 보통 3시간 걸립니다. 

 

  고정 된 시간은 14시 30분에 하산이기 때문에 11시 30분경에 등반하기 시작 하므로 어디 까지 올라가시던 간에 반드시 14시 30분이면 내려와야 하며 거의 3시간 올라가는 것이며,

내려오는 시간은 거의 1시간 30분 소요되어 내려와서 커피 드시고 간단히 컵 라면으로 식사 하고,

 

  하산 할 때는 옥주경천에서 타고 온 말을 다시 타고 내려오는데 내려올 때는 2시간 걸리는데 말을 타고 올라 갈 때는 괜찮았는데,

내려 올 때는 말이 막 내려오니까 조금씩 힘들 수가 있으나 그래도 말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마음이 편하고,

타고 내려오는 것이 좋고,

걸어서 내려오면 무릎이 다 나갈 정도로 힘들고,

 

  해발 5,100m를 하루에 다 등반 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의 도움 없이는 어려우며,

보통 등반을 한다면 2 ~ 3일 정도소요 되고,

날씨는 어떻게 되냐면 비는 온다고 하지만 높은데서 고산이기 때문에 날씨는 믿지 마시고 대비 할 것은 대비 하고,

 

  내일은 가을 바지입고 여름 바지는 달달 춥고 떨어서 안 되고,

트래킹 신을 신고,

제일 처음 시작하다 오르다보면 조금 심한 구간에서 땀이 날 수가 있으니까 얇은 티 입고 해발이 높이가 점점 올라가면서 추울 수가 있습니다.

 

  땀이 바로 빠지지 못하면 감기가 바로 걸리므로 바로 고산증이 옵니다.

그래서 땀이 잘 빠져 나갈 수 있는 얇은 티 하고 바람막이,

오리털 잠바 등 두꺼운 것 하나 대비 하고,

장갑 모자, 썬 그라스 등 기본을 대비하시고,

 

  올라 갈 때 바람 불게 되면 날씨 변덕이 심하니까 어떻게 보면 말 할 수 없지만 올라 가다가 흐리고 햇빛이 없으면 좀 추우니까,

그럴 때는 바람막이 입고 더 추울 때는 오리털 잠바 입고,

또 날씨가 햇빛이 나고 더울 때는 벗고 이런 식을 하여야 합니다.

 

  물은 1인당 2병씩 줄 것이고,

말을 탈 때는 배낭을 메고 타며,

내일의 일정표를 보면 공항으로 이전하기 전에 마사지 혹은 사우나로 정해져 있는데 어떤 분은 사우나,

또 어떤 분은 마사지를 원하기 때문에 지금 국경절이기 때문에 제가 미리 알아야 예약을 하기 위하여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

 

일행 전원이 마사지 원하여 마사지하기로 결정 하고,

 

  계속 이어서 가이드의 설명으로 내일 등반 할 때는 초콜릿 등 간식을 기본으로 준비 하시고,

등반하는 방식,

이동하는 방법은 내일 한 번 설명 드리고 역시 셰르파(sherpa)도 3명이 같이 등반 하고,

때문에 셰르파 따라가는데 옥룡설산 같은 경우에는 절대로 셰르파 앞서 가면 안 되고 뒤에서만,

첫 번째 셰르파 따라가야 되고 또 한 두 번째 셰르파 뒤를 따라가도 옥룡설산에 올라갈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 힘들어서 뒤에서 갈 수 있는데 까지 가겠다, 하는 이런 식으로 올라 갈 수 있는데 까지만 가고 내려오면 된다. 

 

  우리가 탄 관광버스는 정속(60㎞/h) 이하로 안전하게 계속 구불구불 한 중앙선도 없는 2차선 도로를 1시간 41분 정도 달리다가 이름도 없는 휴게소도 아닌 곳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다시 여강으로 향하여 출발......

 

  가이드의 계속 여강에 대하여 설명.......

  여강은 차마고도 때문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1996년도 지진이후에 방송이 나가면서 다음에 1997년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보게 되면 옛날에 나시족 사람들이 많이 집결하여 살았던 하나의 성인데 보기에는 설산과 가까운 곳에서 살았습니다.

 

  생활이라든가, 설산의 기후 때문에 어려워 가지고 좀 더 설산과 떨어진 고성에서 살다가 나중에 이쪽으로 이동하게 된 이유가 바로 차마고도가 이곳을 통해 가지고 이곳의 목씨 왕이 차마고도를 위해서 새로 성을 하나 짓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고성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 고성으로 이주시키기 위해서 혜택을 많이 주었는데 특히 세금 이라든지 사람들은 원래 살았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싫어하므로 조건을 손재주 있는 사람,

손재간이 있는 사람,

여러모로 말안장 이라든가,

손 도구이라든가,

열쇠라든가,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사람,

수공예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차마고도의 마방들이 고성에 들어가서 물물교환하고 물건을 팔고 이런 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반드시 차마고도 마방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여야 하며,

 

  바로바로 수리하고,

교대하고, 

무역이 하나의 손으로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지리적 위치를 보았을 때에도 여강이 차마고도의 중심 지역을 중간에 있으며 지리상으로 보았을 때,

보이, 대리, 여강, 상그릴라, 티벳에서 여강이 중간에 있고,

기후 상으로 보아서 어느 지방에 사는 사람이나 다 여강을 거쳐 가게 되는 데,

 

  왜냐하면 남쪽에 보이차 나오는데 보이에서 사는 사람들 보이차나 대리까지 가도,

올라오면서 해발이 높아지게 되며 여기까지는 도움이 되고 더 이상 상그릴라 가게 되면 좀 더 춥습니다,

상그릴라는 해발 3,300m 이고 티베트 같은 경우는 4,000m로 티베트 같은 고산에서 사는 사람들은 추운 곳에 살기 때문에, 

 

  내려오면 점점 더워지기 때문에 적응이 잘 안돼요,

차마고도 이기 때문에 다 다니고 합니다.

거리상으로 물건의 가격이 틀려지고 이동하면서 여강부터 상그릴라 가는데 보이차는 그만한 가격이고,

보이에서 티베트까지 가면 당연히 보이차의 가격이 더 비싸야 하겠고,

 

  일반적으로는 보통 여기 고성에서 집결하기 때문에 고성이 차마고도의 집산지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차마고도를 위해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들어가 보게 되면 길 폭이 높으며 일부는 초라해 가지고 조금 길을 넓혀지고 있어,

중국이 발전 하게 되려면 길을 넓혀야 된다, 라는 그런 말이 있어요,

 

  이곳의 건축도 목 건축으로 되어 있어 지진이 일어나도 잘 무너지지 않습니다.

기와는 엄청 얇고,

지진이 일어나게 되면 실질적으로 무너지게 되면 기와로 인해 머리를 다치거나 하는 것이 없으며,

그래서 목 건축이 좋은 것은 여름에 시원하고 나무 향도 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이러한 작용하기 때문에 목 건축을 계속 합니다.

 

  그러면 80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 지금 까지 유지 되어 있나 그건 아닙니다.

왜냐 하게 되면 도시와 똑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800년 전에 모양을 해서 지금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고,

800년 전부터 쓰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살아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옆의 아파트처럼 마찬가지로 무너지게 되면 새롭게 보안 하고,

무너지게 되면 또 보안하고 그것이 하나의 손님을 상대해 가지고 관광객을 상대해 가지고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800년 전부터 지금까지 1층에서 장사 하고 2층에서 잠을 자고,

그래서 북경의 자금성과 기타의 성에 비해서 살아있는 고성이라 합니다.

 

  다른데 같은 경우에는 손님이 빠지게 되면 아무 사람도 없는데 여기는 살아 있는 고성,

그리고 동방의 베니스,

옥룡설산의 만년설이 녹아서 흘러들어 오는 물이 수많은 갈래로 흩어져서 각각 집안으로 옆으로 다 지나갑니다.

다리만 해도 350여개 있고,

고성의 전체는 크지 않지만 골목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계속 돈다 해도 골목길 다 돌라고 하면 한 주일 돌아야 한다.

크지는 않은데 전체가 다 골목길이다.

일부 보아야 될 곳도 오래 동안 고성에 안 가게 되면 일부 고성에서는 한 참 정신이 나갑니다.

그런 면이 있고, 전반적 크기에 보면 가계 밖에 끝이 없습니다.

들어가게 되면 사방가까지 같이 들어가서 사방가 광장에서 자유시간 드릴 겁니다. 

 

  비가와도 국경절 기간이라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이 광장에서 차마고도의 많은 마방들이 광장에서 무역을 교환 하고 진행하면 저녁에 끝나게 되어 쓰레기 밖에 안 남겠지요,

그런데 그 쓰레기 처치하는 방법도 역시 800년 전에 만들어 졌는데 물을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고성 안으로 들어오는 물들이 옥룡설살의 만년설이 녹아서 흘러 들어오는데 그 물을 차단 시켜서 물이 넘쳐 나는데,

그런데 사방가 광장의 시설을 보게 되면 땅이 경사졌고,

돌도 오화석이 깔아 져서 씻기도 좋아서 물을 흘러 내려 보내면 자연적으로 쓰레기가 씻기어 내려갑니다.

 

  지금 보게 되면 혹 가다 아침에 한 번 씩 청소를 할 때가 있습니다.

비가 오게 되면 당연히 물이 더러울 것입니다.

원래는 물 안에 보면 수초도 있고 깨끗한 물인데 비가 오면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것이 씻겨서 내려가기 때문에 물이 더러워지고 날씨가 좋으면 깨끗하고,

 

  들어가서 구경하게 되는데 이동하게 될 때에는 떨어지고 사람 못 찾게 될 경우는 없겠지만 혹시나 일행에 떨어지게 되면 선 자리에서 기다리면 되겠습니다.

제가 거꾸로 가서 찾으면 바로 찾을 것이고,

사방가 까지만 이동 한 다음에 시간도 많으니까 자유롭게 구경하고,

 

  국경절이라 사람들이 많으니까 중요물건은 앞으로 메고, 그런 말 많이 들었지요,

배낭을 뒤로 메면 그냥 가져가라는 거고,

옆으로 메게 되면 같이 나누어 가진다는 거고,

앞으로 메어야 만이 자기 것이다.

중요 물건(여권, 돈 등)은 앞으로 메고 구경하고 식사하고 다시 나와서 호텔로 이동하겠습니다. 

 

  보게 되면 물건이 많은데 주로 물건 파는 곳 이라 물건이 많으나 추천 하는 것은 몇 가지인데,

차마고도의 집결지이고 3대 차 공정도 많고 운남 이니까 보이차 하나 추천 하구 똑같은 품질의 보이차가 북경, 상해, 한국이나 가격 차이가 많이 나며,

 

  보이차 같은 경우에는 몸에 좋고 단지 등급이 30급 까지 많은데 북경 같은데서 30급 하게 되면 이해 할 만합니다.

큰 도시 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차가 직접 나기 때문에 30급 같은 차는 뒤에 장식품을 달아놓고,

 

  마시는 것은 보통 1급에서부터 3급이고 차를 우리게 되면 차의 색깔이 와인 색을 띠는데 만약에 간장 색이나 검은 색을 띠게 되면 안 좋은 것이고, 혈압 등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 작용이 있어 참고로 사도되고,

 

  운남 커피도 유명하여 프랑스의 공항에 가서 보게 되면 운남 커피가 제일 앞에 진열 되어 있고,

옛날에 보게 되면 여강과 4 ~ 5시간 떨어져서 대리라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놀러가서 운남 커피를 마셨기 때문에 대리 커피라고 하는데,

대리도 운남 이기 때문에 운남 커피를 표현을 잘못하여서 대리커피, 대리 커피 하면서 다음에 갈 때 많이 사 달라 하는 것이 많은데,

 

  사실 운남 커피 인데 상점에 중국 돈으로 12위안 하는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은 사지 말고 보통 한 곳이 있는데 여기서 한 봉지에 68위안, 78위안도 있는데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향을 맞아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동파문자가 많이 찍혀져 있는 스카프,

동파문자라는 것은 상형문자를 말합니다. 

동파문자라고 하게 된 이유는 여기 여강 사람들이 믿는 종교가 동파교 이고,

이런 종교의 스님을 동파라고 하는데 이 동파만이 사용할 줄 아는 문자가 상형문자와 같은 것입니다.

 

  종교에서는 상형문자를 쓰고 해서 지금 까지도 쓰고 있고,

동파문자로 여강의 상징이기 때문에 스카프 사도되고, 도강, 고사리, 야크가 많기 때문에 야크 가죽으로 만든 가방 등 몇 가지를 제외 하고나서 살 것은 없습니다.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구경하면 되겠습니다.

 

  가이드가 여강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나니까,

우리 일행들은 오늘의 등반에 피곤으로 인하여 잠시 공자 앞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큰 절을 하고 있으며,

15시 35분경에 여강에 도착하여 관광버스에서 내려서 세계문화유산인 고성으로 향하였다.

 

  여강 고성의 역사   -Daum 인터넷-

  구석기 시대 이후 신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의 유적이 남아있어 오래 전부터 인류가 살아온 것을 보여 준다.

전국시대에는 진나라의 세력 하에 있었으며, 촉 군이 설치되었다.

한 나라 때에는 수구 현이 설치되어 중원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당대 이후는 티베트, 남조, 대리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1271년 송나라 군이 원나라 왕조에 배속되어 있던 대리국을 정복 하면서, 이 땅의 영주를 “리장 선위사”에 임명 하였고,

이것이 “리장”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어 지금까지 8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대도시 여강 고성이 자리하고 있다.

 

  리장에서는 나시족의 목 씨가 선위사를 세습하게 되었다.

그 후 리장군 민부라고 개칭되어 청나라 때는 류관(중앙관리)이 지배하는 리장부가 되었고,

중화민국이 설립되면서 리장 현이 설치되었다.

1949년 7월 인민해방군의 진출로 리장 현 인민정부가 구성 되었으며,

1961년 4월에는 리장 나시족 자치현이 되었다.

2003년 6월 8일 주변지구를 통합해 지금 시로 승격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리적 위치

  윈난 성 북서부의 횡단산맥 남쪽 장강상류 진사 강의 굴곡 부근의 골짜기에 위치한다.

거리의 주위는 언덕에 둘러싸인다.

 

  구 시가지는 평균 해발 약 2,400㎞의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시의 북쪽에는 해발 5,596m의 옥룡설산이 있다.

중국 도시 중에는 따리와 같이 성벽에 둘러 싸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구시가지 주위에는 성벽이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리장을 다스리는 왕조가 당시의 황제 이름 “주(朱)”로부터 두를 취한 “목(木)”이라는 이름을 받아 당시의 수령 아갑아득은 목 씨 성을 가지고 이곳을 다스렸다고 한다.

 

  리장도 이민족의 위협에 직면하기도 하였지만 여강(麗江) 고성(古城)은 성(城)이 없는 성으로 유명 한데,

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목(木)씨의 성은 가진 토사(土司, 추장)가 통치 하는 지역을 성벽으로 둘러싸면,

‘木’자 주위를 감싼 ‘곤할 곤(困)’자가 되는 것을 싫어해 성벽을 축조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대마을 총면적은 3.8㎢로서 지금 6000여 세대 3만 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 유명 관광지로 거듭나 세계 각국의 많은 여행자를 맞이하고 있는데,

이곳은 본래 중국 변방 소수민족의 터전으로서 고유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곳입니다.

 

  1997년 12월 4일에  중국 여강 고대 마을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그 유래는 1996년 2월 3일 저녁 7시 14분, 진도 7.2의 강진이 여강을 강타했던 대 지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3,000명이 사망하고 재산 피해는 집계조차 할 수 없었다.

 

  지진이 가라않고 나서 눈을 뜨고 살아난 사람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 하고 소스라쳐 놀랐다.

당시 이 지역에 있던 신시가지의 시멘트와 철근으로 지은 현대적 주택과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반면 구시가지에 남아있던 800년 전에 나시족의 목재 전통가옥 나무와 흙과 기와로 지은 집은 언제 지진이란 게 왔느냐는 듯이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멀쩡하게 그대로 서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나시족이 첩첩 산중 이곳에 세운 아름다운 소읍 여강은 나시족 고유의 건축술이 빚어낸 걸작이다.

나무와 흙, 그리고 기와로 엮어진 집 사이로 돌바닥 골목길이 닳고 닳아 반들거린다.

800년이나 된 나무와 흙으로 지은 집이 어째서 진도 7.2의 강진에도 끄떡없었을까?

 

  건축 관계자가 몰려와 곰곰이 나무흙집을 살펴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집은 쇠 못하나 박지 않고 작은 구멍을 파서 나무못으로 연결 되어 있었다.

땅이 그토록 심하게 흔들려도 집은 따라서 흔들렸지만 시멘트 철근 집처럼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세계의 유명 건축가와 문화 연구가들이 이 지역에 주목하기 시작하자,

중국 정부는 황급히 구시가지의 전통가옥 복구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유네스코가 여강 일대 전 지역을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하며 오늘날의 고성을 복원해냈고.

덕분에 현재의 여강 고성은 운남성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는데, 지진이라는 대참사가 오히려 도시의 운명을 바꾸게 되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강 고성은 유네스코가 정한 인류 문화유산으로 중국에서 800년 전에 세운 한 시가지가 이렇게 고스란히 원형을 유지한 채 보존 된 곳은 없다.

 

  구시가지 여강 고성에는 집집마다 나시족이 살고 있다.

고성을 어떤 사람은 고원의 물의 도시라 부르기도 한다.

고성에서 바라다 보이는 옥룡설산은 해발 5,596m로 만년설을 덮어쓰고 있다.

끊임없이 사시사철 흘러내리는 옥룡설산의 눈 녹은 물을 끌어들여 사통팔달, 수로는 고성 구석구석을 수놓는다.

고성은 위도 상으로는 열대지방이다.

그러나 해발 2,400m의 고원 지대라 사시사철 꽃피고 새 우는 봄이다.

 

  윈난 성[雲南省] 북서부와 쓰촨 성[四川省]의 경계인 진사강[金沙江], 야룽 강[雅江] 란창 강[瀾滄江] 유역에 살고 있다.

언어는 시노티베트어계 티베트 미얀마어족에 속한다.

원래 동파(東巴)와 가파(哥巴)의 2종류 문자가 있었으나 소실되어 통용되지 않는다.

1957년에 로마자 형식의 문자를 만들었다.

 

  이들의 조상은 한대(漢代)의 '이우이'(牛) 진(晉), 당(唐)시대의 '마사'(麻沙) 또는 '마사'(磨沙)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마사가 건립한 '월석조'(越析詔)는 7세기 윈난 성 서부 일대 오만(烏蠻)의 '6조'(六詔) 가운데 하나이다.

 

  청대 옹정(雍正) 원년(1723)에 여강[麗江] 지역이 개척되자 닝랑[寧蒗], 웨이시[維西], 옌위안[鹽源] 지역의 영주가 여전히 농노(農奴)를 소유함은 물론, 각 지역의 지주경제가 신속히 발전했다.

농업생산의 수준은 이웃 한족(漢族), 바이족[白族]과 비슷하다.

수공업으로는 주동(鑄銅), 방직, 제혁 등이 있다.

여강 강의 동기(銅器)는 역사가 길고 쓰촨 성, 티베트, 서북지방 등지에서 그 이름이 높다.

 

  이들의 신앙은 동파교(東巴敎)로 산, 물, 바람, 불 등의 자연현상을 숭배한다.

'동파'라고 불리는 박수는 법률에 관련된 일을 맡아하는 외에도 약초로 병을 치료한다.

 

  여강 시내 북쪽 산기슭에 있는 호수공원으로 흑룡담 공원(黑龍潭公園)이 있다.

옥룡설산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이 호수를 이룬다.

호수의 물에 비친 옥룡설산과 하늘의 모습이 멋진 장관을 이룬다.

 

  고원 내에는 명나라 때 만들어진 오봉루(五鳳樓), 대정각(大定閣), 유리전(琉璃殿), 해탈림(解脫林), 득월루(得月樓) 등의 건축과 벽화가 보존되어 있다.

 

  득월루(得月樓)는 원래 명조(明朝 1368 ~ 1644)에 지어졌으나 현재의 건물은 1950년 소실 된 후 1963년에 복구한 것이다.

 

  용신사(龍神寺)는 1737년 지역의 나시족(納西族)이 건축 했고 공원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같은 해 청조의 건륭제(乾隆帝 1736 ~ 1796)가 옥천용신(玉泉龍神)으로 이름을 내렸다.

 

  3층의 오봉탑(五鳳塔)은 명조(1601)에 지어졌고 공원 북쪽 끝에 있다.

오봉탑은 원래 30㎞ 서쪽의 복국사(福國寺)에 있었으나, 1979년에 옥천공원으로 옮겨왔다.

옥천공원은 동파(東巴)문화연구회와 동파문화박물관의 본산이다.

 

  옥수채(玉水寨) 옥수채는 여강시의 작은 계곡으로 동파문화의 중심지로 이곳은 나시족의 고향이다.

이 계곡은 옥룡설산 근처에 있다.

옥수채는 J,W,V. ecotourism사가 개발한 경관지역이다.

2001년 6월 AA급 경관 심사를 통과 했고, 2006년에는 AAAA급 심사를 통과 했다.

 

  옥수채에는 폭포, 송어, 신성한 샘, 동바벽화 화랑, 동바 조상의 사원, 백사(白沙)음악 전시관,

나시 형식의 건물과 고대 생활관,

동바 제물의식, 제식장소, 동바 춤, 물레방아, 초원풍경 등과 같은 J,W,V의 민속과 지역 특성이 이루어진 수많은 경관이 있다.

 

  옥수채는 여강 고도(古都)와 같이 나시족 신성한 땅의 한 곳이다.

TNC(자연보전)에 의해 지정된 동바문화 연구와 백사음악의 전승의 요람이다.

매년 음력 3월 5일에는 동바시뤄 사원에서 대동바대회가 개최된다.

백사음악 공연관은 전 세계에 생생한 화석 음악을 보여주기 위해 여강 고도에 세워졌다.

 

  옥수채는 옥룡설산 남쪽 기슭아래에 위치하는데,

여강 고도에서 10㎞ 떨어져 있고, 고도의 주요 수원(水源)이다.

전체 경관지역은 상록수이고,

북쪽에는 우남성의 고대나무목록에 올라있는 두 개의 고대 나무가 있다.

나무아래의 샘은 넘쳐흘러 연못을 채우고 폭포로 흘러간다.

연못에는 비단잉어와 금 송어들이 함께 자란다.

수족관의 고기들은 맛있는 요리가 된다.

 

  1949년 이전까지 닝랑과 융닝[永寧]의 봉건농노제 지역에는 여전히 모계(母系)가정이 존재했다.

여성이 가장이 되고 어머니는 알지만 아버지는 모르며 재산은 모계에 따라 계승되었다.

 

  남자는 어머니 쪽 가정에서 일을 하며 자녀에 대해 부양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중년 이후 배우자관계가 점차 고정되어 가정을 세운 이후에야 자녀들이 비로소 부모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남자는 만년에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 조카딸들을 부양한다.

남녀는 똑같이 양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입고 아이들은 어깨 양쪽에 해·달·칠성을 정교하게 수놓은 조끼를 입는다.

1961년 리장 나시족 자치 현이 세워졌고, 최근 들어 경제, 문화, 교육 사업이 발전하고 있다. 인구 245,000(1982).

 

  나시족은

1. 상형문자를 쓰고 있어 고성의 간판에는 중국어, 영어, 상형문자를 같이 쓴다.

2. 나시족은 평생 목욕을 3번(태어나서, 결혼 때, 죽어서)한단다,

3, 정통복장의 조끼 뒤에는 7개의 둥근모양이 있는 옷인데 복두칠성을 가리킨다,

4, 이 조끼는 처녀들의 것은 울긋불긋 예쁘고 아줌마들은 북두칠성이 없는 흰 누비옷을 걸친다,

5, 남자들은 만판 놀고 여자가 대형 장비차, 자동차 운전 등 모든 일을 하고 남자는 가끔 장사를 다닌다는데 지금은 다소 나아졌으나 그래도 모든 일은 여자가 한다,

 

  윈난성엔 여러 소수 종족이 살고 있다.

최대 종족인 이족은 650여 만 명에 달하지만 여강을 자치 현으로 자리 잡은 나시족은 여강 밖에서 사는 사람도 모두 합쳐서 불과 25만 여명 밖에 안 된다.

 

  그리고 나시족 전통 복장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인구 30여만 명의 나시족은 모계사회로 알려진 중국의 소수민족중 하나로 점점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어 그들의 문화도 사라지고 있는 추세라는데,

나시족은 원나라 때 중국을 통치했던 몽골족의 후예로 원나라가 멸망 한 이후인 명나라와 청나라 때도 여강을 다스리는 귀족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언어, 문자를 가진 민족이라고 한다.

 

  나시족 여성 전통의상 ‘양가죽 이투’가 의미하는 것은 뒤에서 보아서 T자 모양의 어깨 망토는 하늘을 상징하고,

등 부분의 까만색은 밤을 상징하고,

하얀색은 낮을 상징하고,

등에 수놓은 7개의 원은 별(다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 허리를 감싸는 하얀 부분은 양가죽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새벽에 일하러 나갔다 밤에 돌아 올 때 허리를 따뜻하게 하여 다산에 도움 되게 하기 위함 이라고 한다.(일교차가 큰 지역에서는 새벽과 밤에 기온차가 많이 내려간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을 때 X자의 하얀 멜빵 끈 중간이 꼬여 있으면 기혼이고 꼬여 있지 않았으면 미혼을 표시 한다고 한다.

소수부족으로서 부족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일단은 머릿수가 많아야 하니까 종족 번식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또 경제 활동은 모두 여자들이 감당하고 남자들은 밤 일만 잘하면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나시족 남정네는 팔자가 늘어졌다.

들판에 여자 밖에 없다.

남자는 낮잠을 자거나 빈들빈들 마실 을 다니거나 대낮부터 술을 마신다. 그 바쁜 농사철,

고사리 일손도 아쉬운 판에 여자만 바쁘지 남자는 여유롭기 만 하다.

나시족 인구가 불어나지 않는 것을 혹자는 하루 종일 일만 한 여자가 저녁 수저 놓기 바쁘게 곯아 떨어져,

남자가 씨 뿌릴 짬이 없어 가임 여성의 임신율이 낮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시족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

생활력이 강해보이는 밝은 모습의 나시족 여인이 지고 가는 큰 망태 안에서 연기가 나 길래 놀라서 다가가 보았더니,

아뿔싸!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시족은 남자들의 천국이었다.

 

  다른 종족 게으른 남성이 나시족 처녀에게 청혼을 해 보지만,

나시족은 자기네 혈통을 지켜 타 종족과 결혼하지 않는다.

타 종족은 나시족이 사납다고 말한다.

소수 종족이 제 피를 더럽히지 않고 제 땅을 지키며 수천 년을 내려 왔다면 다른 종족 눈에는 사나울 수밖에 없다.

 

  원나라가 망하고 나서 청나라 말기 까지 이곳 여강의 주류 민족으로 남아있는 나시족의 처세술은 뛰어났다.

나시족 남자들은 한가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들 나름대로 일생에 세 가지 일을 이루어 내어야 한다는데,

 

그 첫 번째가 집을 지어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귀족으로 살아가기 위해 평생 공부를 하여야 하며,

 

마지막 세 번째는 자손 번성을 위해 아내에게 잘 해야 한다고 한다.

 

  나시족은 고도의 문화를 자랑한다.

건축술, 가죽, 금속공예도 뛰어나지만 자신의 문자가 있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들의 문자는 상형문자다. 1,300여 글자 중에 200여자는 퇴화했고 1,100여 자가 남았지만,

요즘 젊은이는 제 글자를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아 나시족 노인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런데 근년에 초등학생이 의무적으로 나시 상형문자를 배우기 시작해 노인은 한시름 놓게 됐다.

 

  또한 문화적 경관으로 동바(Dongba) 학교는 새로운 동방 문화세대 육성을 위해 J.W.V에 지어졌다.

교육 자료는 운남성(雲南省)의 사회과학원의 동바문화학회가 발표한 100 여권의 동바고전이고,

70여세의 두 동바스승이 있다.

 

  신입생은 동바문화를 전승하길 원하는 젊은 남자들이다.

현재 11명의 학생이 있고 7명은 2 ~ 3년의 학업을 마쳤다.

그들은 고용인으로 대우 받는다.

교육 체계는 2년의 학생 수업과 4년의 후계자 수업 그리고 4년간 동바 연구이다.

동바문화 유적 전시관은 여행객들에게 개방된다.

 

  나시(納西)마을에는 고대 종이 제조 방법과 작업장, 고대 양조장과 작업장, 직기로 짜는 천 등을 보여 준다.

 

  J.W.V경구에는 나시음악“Belshixili”, 원시적인 춤“Renmeda”, “Weimenda”, “Guqi”, “Yahali” 등의 독특한 나시 공연을 재현 하는 30명의 전통적인 나시 공연밴드가 있다.

 

  “Leba dance”는 72장의 춤과 20곡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춤이다.

우리는 춤 강사 Li Wenxian를 고용 했는데,

그는 라바 댄스 그릅을 체계화 하여 생동감 있는 라바 댄스의 전체의 장과 음악을 공연 할 수 있는 유일한 명인 이다.

 

  중국 운남성에 위치한 여강은 중국 여행지 치고는 아직까지 많이 낯 설은 곳이다.

그 동안 중국 사람들에게 조차 잃어버린 땅으로 여겨지다가 1996년 대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중국 전역에 알려졌다.

 

  이 때 여강을 방문한 장쩌민 주석의 “관광지로서 개발하라”는 지시에 신 공항이 건설 되면서 때 묻지 않은 소수민족들의 생활상들이 외부 세계로 알려지며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능수버들이 늘어진 거리

         -Daum 인터넷에서 발취-

 

 

  이제 고성 안쪽으로 발길을 옮겨봅니다.

고성에 들어오니 능수버들이 늘어진 거리 양편에는 상가로 이루어진 골목길이 있고,

이를 따라 가다보면 광장을 지나 “중국 국가명승지”라는 돌에 새겨진 표석이 있다.  

 

 

                          국화꽃으로 장식된 수로

               국화꽃으로 중국 국가명승지 표지 석

다시 이를 지나면 수로 양옆에는 장식 되어 있고, 멋들어진 버들가지가 유혹을 하며 무대가 설치된 상가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동파 상형문자가 벽에 그려져 있는 곳을 지나 보면 상가 앞에서 손오공과 나시족의 고유 복장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있으며,

 

                                     나시족의 동파 상형문자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바로 도시를 둘러싸고 흐르는 수로였는데,

       나시족 처녀 복장과 남자의 고전 분장

                 고성 수로

여강 고성 내부 어디에서나 수로를 볼 수 있었다.

 

옥룡설상에 만년설이 녹은 물이 지하로 흘러들어 흑룡담이란 연못으로 모이고 수로를 통해 고성으로 공급 되는데 골목 마다 수로도 함께 있어 주민들에게 생활용수로 공급하고 있다 한다.

 

  고성의 수로에 흐르는 물은 상수, 중수, 하수로 분리 되는데 상수는 식수, 중수는 채소 씻는 용도였으며, 하수는 빨래하는 물이라고 한다.

이러한 물 관리는 철저히 지켜졌으며 고대부터 여강 고성에서 지켜온 것이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수로 주변을 잘 가꿔 도시 미관까지 살리고 있으니, 이 지역 사람들의 도시설계기술이 꽤 탁월한 듯 보인다.

수로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물고기들도 쉽게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일행이 도착 했을 때는 늦은 오후라 물고기는 보지 못하였으며, 과일을 씻거나 세탁을 하는 현지인들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수로 주변에는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을 살린 레스토랑과 카페가 즐비하다.

여강 고성을 흔히 '동양의 베니스'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고성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수로를 바라보며, 노천카페에 앉아 여유 로이 차를 한

                       나만의 추억을 간직한 고성

모금 머금어 봄직도 나만의 추억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울창한 버드나무 잎이 처마에 드리워져 있고, 공기는 정말이지 청량해서, 마음까지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내가 시간을 거슬러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고풍스러운 고성 풍경에 감탄사도 끊이질 않고,

어느새 황홀경에 빠져선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에 손이 절로 렌즈를 향하게 되었다.

 

                           금옥화루(SAKURA)

  가이드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강아지 끌고 가듯이 우리 일행을 급히 고성의 중심지인 사방가(四方街)에 데리고 와서 사방가의 물청소 방법을 설명 하는데,

 

사방가 앞 수로를 막아서 물이 사방가로 넘쳐흐르게 한 다음에 사방가는 경사가 되어 있어서 물이 흘러 내려 갈 때 자연적으로 내려가는 물에 의하여 청소 한다고 설명 하고,

 

  우리 일행이 식사할 장소는 왼쪽에 있는 금옥화루(金屋花樓) 일대를 카페거리라고 하는데 카페거리는 마을에 절기라고 합니다.

18시에 예약이 완료 되었으니까 와서 식사하면 된다. 라고 하며 각자의 자유 시간을 18시 까지 이곳을 구경하고 도로 이곳에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할 것.

 

  이곳 마을의 중심인 사방가는 명, 청 시대부터 서북의 차 상업 차마고도의 마방의 요점 이었다.

사방가에는 붉은색의 오화석(五花石)으로 되어 있어 비가와도 발에 흙을 묻지 않고 돌무늬로 인해 거리의 아름다움이 더 돋보인다고 한다.

 

  여강은 차마고도의 주요 경유지로 물류의 집산지가 되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무대가 설치된 사방가

당시 이곳 사방가는 교역의 중심이 되었던 장소로 낮에는 화물교역시장이 서면서 수많은 인파가 몰리게 되지만 밤이 되면 이곳 사방가는 지친 몸을 쉬는 숙박지로 변신 한다고 한다.

 

사방가는 지금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번화가여서 이곳을 찾으면 으레 다녀가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들이 갔을 때는 국경절이라고 하여서 사방가 광장에 무대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로 인하여 광장 자체는 볼거리가 없었다.

 

  이제 고성의 중심지인 사방가는 오화석의 네모난 돌을 블록 같이 깔아 놓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밝고 다녔는지 반질반질 한 곳에서 다시 발길을 옮겨 봅니다.

우선 사위가 가이드에게 질문 한 전망대 지역으로 가고자 조금 높은 곳에서 고성 전체를 조망 할 수 있는 곳으로 올라가 보기로 합니다.

 

        사자산 만고루 경구 안내판

              동파 관경대 입구

  전망대가 있다고 해서 사방가에서 왼쪽에 있는 사자산(獅子山) 방향으로 올라가는데,

 

비가 약하게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여 나와 사위는 그 비를 맞으며 올라가 사자산 만고루경구(万古樓景區)에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입장료가 1인당 100위안(한화 약 20,000원)으로 하여 조금 아래인 동파관경대(東巴觀景臺)는 1인당 입장료가 음료 포함 80위안(한화 약16,000원) 으로 2층에 올라가 고성이 잘 보이는데 자리 잡고 앉아 차를 한 잔씩 시키고 있으니까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고성의 옛 건축물을 향하여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니 산이 둘러싸인 평야 지대에 펼쳐진 목조 건물의 기와지붕이 마치 호수를 보는 듯 한 놀라운 풍경이 자리 잡고 있으며 저 멀리 수많은 건물들을 보니 이제야 여강 고성의 규모를 실감케 된다.

                                      렌즈에 통해본 고성 전경

 

           기타 음률에 취하고

  나와 사위는 차가 나와서 차를 다 먹으면 우리 주의에 보온 물병을 같다 놓고 다시 먹은 찻잔에 더운 물을 계속 부어주는 무한 리필 식 이었다.

 

또 한 기타를 켜는 젊은 사람이 라이브로 중국 노래를 부르는데 중국어 가사는 모르지만 기타 음률에 취하고,

이렇게 비가 조금 그칠 때 까지 약 1시간가량 머무르면서 나와 사위는 여기서 바라보는 고성의 풍경 또한 만만치 않게 무척 좋아서 고성을 마음껏 눈으로 보고 가슴에 담아 그도 모자라 카메라 렌즈를 통해 담아 보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금 이 시간이 해가 넘어가 노을이 지는 시점인데 아쉽게도 비는 심술부리며 그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지 못하게 계속 비를 뿌리고 있어 노을 지는 운치에서 한 잔의 차를 먹으며 느껴보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사자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고성

 

  어느 정도 비가 그치었을 즈음 우리는 나와서 사자산의 정상에 가니 여기서 보는 고성은 한 눈으로 들어오는데 고성은 낮은 지대에 있고 주위에 현대 건축물로 둘러 싸여 있어 고성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와 사위는 사자산에서 내려와 사방가 이곳은 성벽이 없는 고성으로 반들반들하고 깨끗한 돌들로 된 좁은 골목길에 나무로 지은 전통가옥 들이 줄지어 상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골목은 졸졸 흐르는 수로 위에는 작은 다리들과 예쁜 꽃들이 한 폭의 그림인 듯 한 곳의 다리 밑의 수로를 막아서 물이 당연히 차 올라올 것이고, 넘치면 이 물이 흘러서 더러워진 것들을 사방가와 좁은 골목길을 깨끗하게 물청소하여 씻어 낸다고 하는데 말이 되며, 나시족의 옛사람의 수리 계산에 뛰어난 자동 물청소하는 방법이다. 

 

  수로를 따라 좁은 골목길의 구문관(口門官) 방향으로 나아가면 관광객을 대상으로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여강시는 차마고도의 마방들의 집결지로 교역이 매우 활발했던 곳이라서 이곳 고택은 모두가 상가로 이루어 졌으며,

 

  상가의 물건들은 한 결 같이 많이 있으며 각양각색의 기념품, 이곳의 특산물중의 하나인 은세공제품, 차, 보석, 동파상형문자를 새겨 넣은 각종 토기와 도자기류, 현장에서 직접 짠 직조물도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잘 조성된 고성 식당가에서 먹고 싶은 생각을 간직하고

 

  한편 식당가도 잘 조성 되어 있어 한 번쯤 이 곳에서의 식사도 추억으로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마음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눈으로만 보는 것을 만족으로 느꼈다.

특히 이곳 운남성은 유명한 보이차의 원산지로 명성이 자자한데다, 중국의 국경절이라서 그런지 중국인들이 많아서 서로 어깨를 부딪치면서 가야 할 정도로 관광객들이 많았다.

                  구문관 입구

               구문관 지나서 상가

 

  나와 사위 하고는 주변 상가를 눈으로만 둘러보고 계속 나아가 구문관을 지나고 천우류방(天雨流芳) 문을 지나 벽에 동파문자가 그려져 있는 우측으로 나아가니, 의사청(議事廳)이 나오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 나중에 가이드에 물어 보았으나,

                    천우류방 문

          내용도 모르는 의사청 건물 입구

가이드도 모르고,

 

의사청에 들어가려고 시계를 보니 가이드와 약속 시간이 15분여 남아 있어 시간 관계상 발길을 되돌려야 하는 씁쓸한 마음을 안고 급히 사방가로 향하였다.

 

            고성 어디를 가나 이렇게 수로가 있다.

  고성은 수로를 끼고 상가가 부채 살 모양으로 좁은 골목으로 형성되어 있어 고성 전체를 관광 하려면 최소한 3일이 소요 된다고 한다.

 

그런 고성을 우리는 단 1시간 만에 관광 하려니 수박 겉핥기식으로 눈으로만 보고 가슴으로 담아두지 못 하였다.

아쉽고 아쉬운 짧은 시간의 관광을 뒤로하고 사방가의 저녁 식사 장소 금옥화루(金屋花樓)앞에 약속 시간에 맞게 가니 가이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서 미안한 마음이었다.

 

  금옥화루의 2층으로 올라가니 실내가 어두워지고 있어 어둠침침한 식탁위에 식사가 한식으로 나오는 데 탁상용 이동식 전등이 환하게 밝히기는 역 부족이었다.

 

                     금옥화류 전경

  여기서도 야채볶음, 토마토, 고추, 상추가 나오며 고추장도 곁들여 나와서 일행 모두가 맛있게 먹고 또한 돼지고기 제육볶음도 제법 맛이 있어서 밥을 많이 먹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한국의 식당에서 먹는 것과 똑 같지는 않으나 비슷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이윽고 해가 지고 상점들은 저마다 불을 밝히고 변신을 꾀하며, 낮에는 고성 전체가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만 들렸는데,

 

                무대에서 흐느적거리는 춤을 추는 미녀들

  어스름 저녁에 가이드를 따라 이동 하는데 거의 모든 상가가 낮에는 카페, 밤에는 주점으로 변신 하는 유흥 카페는 무대가 설치되고 음악은 크게 틀어 놓고,

 

젊은 남녀가 나와서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춤이 무슨 춤인지는 모르겠지만 팔을 아래로 내리고 좌우로 흔드는 모습의 춤에 힘이 없고 형식적인 동작을 사위가 따라 시늉하는 데 흐느적거리는 몸동작이 우리 일행의 흥을 복 돋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처럼 서서히 여강 고성에 밤이 찾아오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니 골목을 거니는 느낌이 낮과는 사뭇 달랐다.

붉은색을 좋아하는 중국인, 저녁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하니까 여강 고성은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여행객의 천적인 비가 오기 시작하여, 상가 골목을 따라 계속 걷다보니 사방가에 설치된 무대는 모두 철거 되었고,

나시족의 젊은 여인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우산을 받치고 서 있는 것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며, 한편에서는 말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시족의 젊은 여인들의 전통의상

         관광객을 기다리는 말과 마부들

 

  우선 나에게 급한 것은 트레킹화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5년여 동안 신지 않고 보관 하였다가 이번 트레킹 여행에 신고 와서 호도협을 트레킹 도중에 트레킹화 창이 떨어져 너덜너덜 하여서 내일의 옥룡설산 등반에 대비를 위한 트레킹화 구입이 급선무여서,

가이드에 이야기하여 고성 사방가 출구의 스포츠센터에서 트레킹화를 350위안에(한화 70,000원)구입 하는 동안 우리 일행은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나로 인한 시간을 지체 하여서 미안한 마음을 가슴에 안은 체 고성의 야경의 즐거운 풍경 볼 것을 일부도 보지 못하고,

 

  여행객들 사이에서 입 소문을 통해 알음알음 알려져, 중국 여행을 좀 해 봤다하는 사람들에게는 중국여행의 필수 배낭여행 코스로 꼽히는 여강,

아쉽게도 단체 관광여행이다 보니 시간에 쫓기고 나 개인의 취향이 달라 여러 곳을 구경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던 여강 고성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음을 기약하며,

 

  여강 고성에서 잠시나마 정말 중국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운치 있는 풍경에 수많은 미사여구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아름다웠던 여강의 고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떠나고 싶으시다면 지금 바로 운남성 여강 고성으로 여행 계획을 해 보시길 바라는 부탁을 드리며,

가이드를 따라 부지런히 버스 타러 갔다.

 

  가이드의 내일 일정에 대한 설명으로.......

  15분이 경과한 다음에는 호텔에 도착 하여 짐 정리를 다하고 내일 바꾸어서 입을 옷을 편리하게 놓고,

내일도 짐을 호텔에 맡기고 돌아와서 식사하고 호텔에서 짐을 정리하면서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마사지 받고나서 바로 공항으로 갑니다.

 

  내일 중요한 일정이니까 몸을 씻고 나서 편하게 푹 쉬세요,

내일 07시에 출발하기로 하고 말 타는 데에다 말을 해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국경절이기 때문에 패키지 소님들이 한, 두 팀 끼게 되면 말 타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시간을 맞추어 예약하였으니 바로 말 타게 하라고 약속되어 있으며, 등반하는 시간도 늦어 질 수 있기 때문에, 06시 50분 까지는 전부 다 호텔 로비에 짐을 가지고 모여 주시면 짐을 맡긴 다음에 07시에 출발 하겠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동안에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찾고 룸을 배정 받은 뒤에,

사위가 하는 말이 팩 소주 2병이 있으니 간단히 한 잔씩 하자고 하여서,

그렇게 하자 하니까,

호텔 옆에서 포장마차에 가서 안주 사러가는 사이에 나는 간단히 샤워하고 나니까,

사위가 안주(버섯꼬치 외 2가지)를 사들고 와서 나와 사위 하고 내일 등반의 파이팅을 하고 간단히 소주를 마시며,

내일 나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어 갈 수 있는데 까지 갈 테니 중간에 나를 기다리지 말고 정상까지 올라가서 사진을 찍어 오라고 당부하고서 맛있게 나머지 소주를 먹고,

고성의 야경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내일의 전투를 위하여 편안한 잠자리로 가서 휴식의 밤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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