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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편 호도협 차마객잔, 28밴드, 중도객잔

도솔9812 2014. 1. 21. 14:13

제 2편 호도협 차마객잔, 28밴드, 중도객잔

2013년 10월 04일

 

  얼마나 고단하였던지 05시 30분에 모닝콜의 전화 벨 소리에 잠을 깨서 창문을 열어 보니 어둠침침한 새벽 아침 하늘을 쳐다보니 우기 철이라서 그런지 “옥룡설산”이 처녀봉이라서 우리에게 보여주기가 수줍어서 비 올 것 같은 엷은 목화 솜 이불로 덮여 있어 무척 당황하였다.

여행객의 천적인 비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운명처럼........

 

  아무리 처녀봉 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얼굴만이라도 보여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해보고,

이곳 나시족 들이 타국인에게는 얼굴을 보여주지 말라고 기도 하여서 설산의 신령에 부탁하여 얼굴을 하얀 목화솜 마냥 부드러운 이불로 가리고 보여주지 않는 옥룡설산의 뜻과 생각이라면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가이드의 일정에 따라 호텔 1층 식당에 내려가 뷔페식으로 식사를 마치고 트렁크를 챙기고 내려와서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호텔 로비의 짐 맡기는 곳에서 트렁크를 맡기고,

오늘 산장에서 숙박에 필요한 짐만 배낭에 챙기고 지정된 07시 30분에 버스에 승차하여 45분경에 “호도협”으로 출발…….

 

  가이드 김성용이 오늘 일정에 대한 설명으로.......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제 “호도협”으로 2시간 30분 이동합니다.

중간에 한 번 휴식 하시고 도착한 다음에 미니 빵차로 바꾸어 타시고 한 15분 올라갑니다.

배낭을 잘 체크하시고 내리세요, 왜냐하면 이 차와는 내일 오후 1시 경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귀중품을 빠치게 되면 다시 찾기가 어렵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잃어 버렸으니까,

 

  도착 하여서는 트레킹 1시간 정도 진행할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도착하면 1시간 트레킹 하고 나시객잔에서 점심 식사를 드시고, 그러고 나서 트래킹 5시간 이동하고 중도객잔에 도착할 것입니다.

제일 어려운 구간이 28밴드입니다.

 

  28밴드라는 것은 28구비를 계속 타고 올라가는 것으로, 아무리 오르막길이 많다고 해도 중간에 평지 한번 나타나거나 혹은 내리막길 나타나거나 하게 되면 괜찮은데 줄곧 올려치니까 좀 힘들 수가 있습니다. 중간 올라가서 제일 높은 곳은 해발 2,700m입니다.

우리가 트레킹 시작 한 지점은 해발 2000m 전후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해발 2,700m 올라가고 투숙은 해발 2,400m입니다.

 

  가이드가 설명하는 중에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 앞으로 좌회전을 급히 하여서 운전자의 순간 방어 운전으로 충돌을 피하고,

자칫 잘못 과속 운전하였으면 충돌 사고가 날뻔 하여서 여자들이 버스에서 “어머나” 하고 소리 지르고 하니까.

 

  가이드 왈 하시는 말씀이 “여기는 이렇구나.” 하고 따라만 주시고 이동 할 때도 길거리 건널 때도 저 뒤에 따라서 이동하면 되겠습니다. 

현재의 여기의 상황하고 물론 자동차로 막 지나가겠지만 사람이 차를 약속 하지 차가 사람을 약속 하지는 않아요,

지역마다 문화가 틀리니까.

 

  28밴드의 내리막길 내려가서 해발 2,400m에 투숙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제 말씀드린 것과 마찬 가지로 셰르파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몇 가지만 주의 할 사항은?

  호도협은 협곡이기 때문에 낭떠러지가 위험하니 사진 찍히시는 분 그냥 선 자리에서만 찍히고 절대로 앞, 뒤로 이동할 때 잘못하면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하시고,

단체 또는 일행끼리 모여서 기념사진 찍고 나올 때 천천히 앞 사람부터 한 사람씩 나오면 됩니다.

 

  만약에 한꺼번에 일어나서 나올 경우 등에 메고 있는 배낭으로 뒤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밀치는 경우가 있어 뒷 분이 균형을 못 잡고 넘어지는 경우로 인한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경우가 없도록 조심 할 것.

또 사진 찍을 때는 포인트가 여러 개 있습니다.

찍다보면 포인트가 나올 때 찍으면 된다.

 

  그리고 우기 철이 안 지나서 비가 이렇게 뿌리고 또는 비가 내릴 것 같지만 도착해서 개일 수도 있다.

또한 역시 계속 내릴 수도 있고, 개일 수도 있다. 해발 2,400m이상에서는 날씨의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크게 일기예보는 믿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이동하다 보면 비가 올 때도 있고 개일 때도 있어서 이러한 점을 주의 하여야 합니다.

 

  “호도협” 트레킹 길을 보면 길 폭도 그렇게 좁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을 보게 되면 일부러 협곡 안으로 자꾸 붙으려고 합니다.

점점 더 붙으려고,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넓은 길을 놔두고, 그냥 이동하면 되겠습니다.

이동할 때도 보게 되면 나는 한국에서 같이 왔으니 나는 더 빨리 가야 되지 하는 이런 식으로 이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말씀 드린 시간으로 전체적으로 맞추면 되겠습니다.

이동하다가 가끔씩 경치도 구경하고 주변에 머리 숙이고 이동하기보다도 주의 사항은 이러한 쪽으로 진행 하면 되겠습니다.

 

  현재 이동하고 있는 이 길은 한국 KBS에서 방영된 “차마고도”의 주선입니다.

보게 되면 끝에 나올 때는 마지막에 마방이 나왔잖아요! 마방이 마지막으로 차마고도 무역의 길이다.

현재 보게 되면 214국도라고 합니다. 국도로 변했습니다.

 

  여기(여강)서부터 시작 하여 티벳의 랏사 까지 총 2,200㎞의 거리가 나왔습니다.

“차”는 마시는 차(茶)고 그 때 당시의 차는 보이차(普耳茶)를 말하고 “마”은 말 마(馬)이고, “고”는 높을 고(高), “도”는 길도(道)로 차를 말에 실고 운반 했다는 “차마고도”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은 사실은 아니고,

그 때 당시 운남의 차(茶)와 티벳의 말(馬)을 교환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차마고도”라는 말이 제일 처음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소금도 교환하고, 팔고하면서 무역이 진행 됩니다.

언제부터 시작하느냐면 보이차가 자라나는 보이현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그 다음에는 “대림” 옛날의 대림은 여기(여강)하고 6시간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여강”, “상그릴라”, 상그릴라는 여기서부터 4시간 30분 떨어졌습니다.

“호도협은 2시간 30분 떨어졌고,

 

  이 국도를 이용하여 계속 이동하는 것입니다.

“티베트”, 심지어 “인도”, “네팔” 까지 전부 다 무역길이 이 길로 통해져 있습니다.

현재 이 길을 2~30분 이동하면 오른쪽에 214라고 쓰여 있는 작은 비석이 계속 보일 것입니다.

 

  214 국도라는 뜻이고 아래에 작은 수치가 2,200 이라는 수치가 있는데 “티베트”의 “라사”에 가까울수록 점차적으로 수치로 작아지면 이는 “티베트 라사” 하고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는 의미이다.

 

  대부분은 “보이현”부터 “여강” 까지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노새도 중간에 있고 하지만 “여강”부터 시작하여 “상그릴라”까지는 대부분 말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노새라는 것은 숫당나귀하고 말 하고 교배 하여서 나온 동물이고, 노새가 나오고부터는 노새 가격이 현재도 그렇지만 말보다 가격이 더 비쌉니다. 왜 비쌌느냐 하면 노새는 발이 말과 비교해 보면 말보다 좁습니다.

 

샹그릴라 란?       -Daum 인터넷에서-

 

샹그릴라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산골짜기나 그런 장소를 비유 하는 말로 쓰이며 티베트어(語)로 샹바라(香巴拉)라고 하며 “마음속의 해와 달”라는 뜻이다.

본래 샹그릴라라는 소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잃어버린 지평선 Lost Horizon, 1933》에 나오는 지명이다.(소설 속에서 샹그릴라는 쿤룬산맥(崑崙山脈)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라마사원으로 설정 되어 있으며,

위기에 처한 서구가 문명의 정수를 보존하고자 하는 탈출구를 찾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동양적 신비로운 낙원이라고 할 수 있다.)

 

  지상에 존재하는 평화롭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로 묘사되어 무릉도원과 같은 맥락의 “낙원”을 상기시키는 이상향의 상징어가 되고 있다.

한편 1997년 중국 정부에서 원나성 정부는 디칭(迪慶) 티베트 자치주가 샹그릴라라고 주장 했으며,

2001년에 중뎬(中甸)시의 명칭을 샹그릴라라고 공식 개명하였다

 

  이 샹그릴라(香格里拉)의 어원은 장족언어의 한 갈래인 방언에서 온 것이라 한다.

그 가운데 "香"과 "格"는 중디엔(中甸)지역의 옛 장족의 발음이라 한다.

현지 장족의 마음속에 "香格里拉"는 "마음속의 해와 달"이라는 의미로 자리 잡고 있다.

 

  위에 언급한 책 내용은 식민지의 반란으로 급히 피난하게 된 바스쿨의 영국 영사 콘웨이가 우연히 일행들과 납치되어 히말라야 산중에 있는 라마교 사원인 “상그릴라”에 도착한 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소설이 출판된 후, 1944년 할리우드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여 샹그릴라라는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소설과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은 현실 속에서 나타났다.

 

  이후, 반세기 동안 실제로 수많은 탐험가, 여행가, 지리학자들이 소설 속에 나온 샹그릴라를 찾아 인도, 네팔, 티벳 등지를 뒤졌지만 소설 속에서 묘사한 풍경과 일치하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다시 반세기 후 중국 운남성 더친/장족 자치주 경내에서 샹그릴라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1997년 9월 14일 중국 정부는 비로소 샹그릴라가 중국 운남성 더칭 장족 자치주 경내에 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 근래 들어 샹그릴라(香格里拉)의 명칭을 들고 운남성과 사천성의 다툼이 있었지만 결국 2001년에 운남성이 공식적인 지역명칭을 얻어 종디엔(中甸)이 샹그릴라(香格里拉)의 명칭을 얻게 되었으며,

현재 발간되는 운남성 지도에서는 이제 종디엔(中甸)현이라는 명칭대신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낙원인 샹그릴라(香格里拉)현 이라는 이상향이 지리적으로 우리 현실속에 존재하게 되었다.

          -Daum 인터넷에서-

 

  오르막길 위의 산길을 잘 다니어서 말과 비교하면 힘이 상당히 세고 적게 먹고, 말 보다는 일정하게 다니어서 노새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상그릴라“까지 도착 하게 된 다음에 ”상그릴라“ 부터는 시작하여서는 노새는 어렵습니다.

겨울 같은 경우에 눈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이동조차 할 수가 없어서 “보관”에서 운반 제일 잘 하는 야크를 사용한다.

 

  우리가 앞으로 옥룡설산에 등반하게 되면 가끔씩 야크를 방목 하는데 볼 수가 있고 또는 못 볼 수도 있지만 옥룡설산에도 야크가 상당히 많다.

야크 같은 경우에는 해발 3,200m 이상에서만 사는데,

사람은 해발 3,200m부터 고산증이 옵니다.

하지만 야크는 해발 3,000m 이하에서는 저 산병이 와서 높은 지역에서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차마고도 이 길이 생기게 된 이유라면 당 나라 때 티베트는 하나의 나라로서 “토호국”으로서 나라의 수령을 “송창강도” 라 하며 그 때 당시 실력이 당 나라와 거의 비슷하니까,

당나라의 “문성공주”가 토호국으로 시집가는 과정으로 시집 갈 때에는 석가모니 12 동상을 들고가고, 고산에서 자랄 수 있는 야채 종류의 종자를 가지고 가는데 그 이름을 “칭카”라고 하며, 또 보이차를 가지고 가고, 보석 이라든지 가지고 갔는데,

 

  제일 처음에 들어와서 보게 되면 티베트 종교가 있었는데 바로 그 때 당시 불교가 들어가면서 많은 시간을 걸쳐서 융화 안 되고 싸우고 이러다가 나중에 제일 초기적으로 믿어 왔던 종교와 티베트의 풍속 이라든지 습관을 결합해 가지고  라마교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승려들의 오른 팔이 승복 밖으로 나왔다.

그것은 티베트 사람의 조상이 겨드랑이 밑을 통해서 나왔기 때문에 신성한 팔을 밖으로 내 놓는다고 한다.

 

  티베트 사람들은 옷을 두껍게 입는다.

왜 두껍게 입느냐 하는 것은 티베트 사람이 사는 환경이 해발 3,700m이상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말을 탈 때에는 채찍질하기가 상당히 불편 하여 오른쪽 팔을 밖으로 내 놓는다.

이런 여러 면의 상황이 결합해 가지고 라마교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칭카”라는 종자를 보게 되면 해발 3,700m 이상에서는 야채가 잘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티베트 사람들을 보게 되면 무엇을 많이 먹느냐 하면 고기를 많이 먹고 술을 많이 마십니다.

술은 야크 젓을 계속 저으면 위에 기름기가 뜨면서 열이 나고 덥게 되는데 이렇게 만든 술을 먹는데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다 보나까 소화가 잘 안 되어서 보이차를 먹으면 소화를 돕습니다.

그때당시 보이차 같은 경우는 소화를 먼저 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야채가 자라지 않기 때문에 비타민이 결핍됩니다.

비타민이 결핍되기 때문에 차를 많이 마시는데 그냥 차를 마시는 게 아니라 그 차를 수유 안에다 넣어가지고 소금도 조금 넣고 물도 넣고 섞이게 되면 수유차가 되는 것입니다.

순전히 수유차를 많이 마시고,

 

  일반적으로 아침에 식사하는 것을 보게 되면 장족의 주식인 칭카 라고 하는 보리 비슷한 곡식입니다,

이 칭카를 빻아 가루를 만들어 물이나 야크 젖에 만든 수유차에 적셔서 뭉쳐 먹습니다. 짠빠라는 음식인데 이들의 주식입니다.

 

  “호도협”에서 가끔씩 수유차로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상그릴라” 더 북쪽으로 올라가게 되면 전부 수유차를 먹습니다.

습관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식사를 하게 되니까 차(茶)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때 당시에 수유차에 차를 마음대로 못쓰게 되어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차마고도”의 길이 생기게 됩니다.

 

  차마고도는 길이 3개 이었습니다.

현재 달리고 있는 이 길을 전장도로 라고 합니다. 하나는 운남성의 약칭인 전 이라고 하는데, 장은 외국사람 들이 티베트를 티베트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서장이라고 하는데 서장에는 티베트 족이 사는 게 아니라 장족들이 살고 있다. 운남에서 서장으로 통하는 길이라 해서 전장도로라고 하고,

 

  그리고 천장도로가 있다.

북쪽으로 가게 되면 사천성이 있고, 티베트 같은 경우에는 서북쪽에 위치해 있고 사천 같은 경우에는 북쪽으로 위치해있다.

천장도로는 사천으로부터 운남을 통하는 길로서 이런 식으로 이동하거나 무역을 하는 도로입니다.

 

  마방들이 왕복을 한 번씩 할 적에는 반년이 걸리게 되는데 그 중에 살지 못하거나, 협곡에서 떨어지거나, 혹은 산적을 만나서 죽거나 이런 식으로 위험해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동하는 동안 식당에 대해서 주의해 보시면 식당에는 육 패거리가 걸려있습니다. 지방의 대부분 식당에는 걸려있습니다.

고기는 돼지고기 인데 염장 식으로 소금을 발라가지고 바람으로서 말리는 것이다.

햇빛아래서 말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돼지고기는 반년이나 일 년 지나도 상하지 않습니다.

 

  마방 같은 경우 땀도 많이 흘리고 하기 때문에 짠 거 많이 먹게 되지만 동시에 고기도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때 당시 고기를 보관 할 수도 없고 산길을 가다 보게 되면 음식을 먹는데 없을 수도 있고 하여 이런 식으로 고기를 들고 가서 먹는다.

여강에는 8년짜리 염장한 통돼지도 있는데 상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마방들이 음식을 먹습니다.

 

  여기 보게 되면 22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제일 주로 살고 있는 민족은 나시족 인데, 나시족이라는 이 말은 그 민족의 말입니다.

56개 소수 민족에서는 20여개의 소수민족 자신의 언어가 있고, 나머지는 거의 비슷하면서 좀 틀려지는 것이고, 그러면 여기에 소수민족이 많게 된 이유는 산이 많기 때문입니다.

 

  소수민족의 하나로 되려고 하면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이 민족이 반드시 100년 이상의 역사가 있어야 하고, 자신들의 문자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일정한 인원수가 되어야만 소수민족이 탄생하게 됩니다.

 

  앞으로는 중국에서는 민족이 많으면 많을수록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늘릴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지도를 보면 1/3이상 땅 자체가 거의 소수민족이 집결되어 있는 곳이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혜택이 많다.

 

  산이 많기 때문에 단일한 민족에서부터 시작하다가 산이 하나 막히게 되면 산의 저편의 사람들이 해발 낳은 곳에 살게 되면 따뜻하기 때문에 복장 이라든가 모든 것이 좀 틀려 집니다.

그리고 나무가 많게 되면 건축 상 나무로 집을 많이 건축합니다.

 

  이쪽 면에 해발이 높게 되면 성격상으로 시원시원 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쪽이 돌이 많으면 돌로 집을 많이 건축하고 역사가 100년, 200년 되면서 습성이라든지 모든 것이 다 틀려 집니다.

그러다가 다시 문자가 있고 하면 하나의 소수민족이 생길 수가 있는데 이 지방에 산이 많기 때문에 소수민족들이 제일 많다고 생각 하시면 되겠습니다.    

 

  나시라는 말은 주로 검다는 뜻입니다.

자외선이 강하기 때문에 피부가 검어서 나시족이라는 민족이 나오게 됩니다.

나시족을 보게 되면 여자들이 일을 많이 합니다. 아이를 키우든지, 힘든 일, 남자들이 하여야 할일인 집을 짓는 일이라든지, 기타 모든 일을 여자들이 합니다.

 

  그러면 남자들은 무엇을 하느냐면 남자들도 할 일이 많습니다.

담배 피워야 되지, 술도 마셔야 되지, 기생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답답하게 되면 가끔씩 시도 쓰고, 그러다가 더 답답하게 되면 총 들고 말을 타고 산에 들어가서 사냥을 합니다.

현재 세계에서 나시족 남자들의 일이 제일 크게 바꾸어 진 것이 도박, 마약, 사냥 세 가지 이며, 요즈음 골프도 많이 하고, 산에는 곰이라든지 야생 동물이 많아서 아직까지도 사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가 생기된 이유는 차마고도 때문입니다.

마방은 대부분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가 마방으로 나가면 집안에 남자가 없으면 할 수 없이 여자들이 일을 많이 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런 말이 있는데 나시족 여자가 시집와서 집안에 들어오게 되면 마치 노세 6마리가 들어 온 것과 같다.

그것이 나쁜 뜻이 아니라 좋은 뜻입니다.

 

  옛날에도 남, 녀가 같이 사랑하게 되면 남자 집에서 은팔찌를 여자한테 선물 주라고 하여 여자에게 주는데 결혼 후에 은팔찌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은팔찌를 끼게 되면 신체상황에 변화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신체 상황이 안 좋게 되면 집안에 들어와서 일을 할 수 없고 다른 것이 아무리 좋아도 가정에 유지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결혼의 동의를 하지 않는 관습이 있습니다.

 

제 2편 호도협 차마객잔, 28밴드, 중도객잔

                                                                 면양피를 가공해서 개구리 형태로 재단 한 것임

  나시족의 여성들의 전통 옷차림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가슴에 X자로 묶인 어깨걸이, 칠성양피(七星羊皮)로 전통 복장이 여자의 등을 저고리모양으로 덮고 있는데 조끼도 아니고 아주 특이한 통 양가죽으로 개구리 모양으로 만든 이유는 여강의 북쪽에는 산적들이 살고 있고 서쪽으로 보면 토호족이 살고 있고, (-사진 Daum에서-)

 

남쪽으로 보면 대리족이 살고 있어 중간에서 많이 당합니다.

개구리 같은 경우에는 알을 많이 낳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게 되려면 사람이 많아야 하기에 개구리 모양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개구리 모양 위에 보게 되면 일곱 개의 원 모양에 오색실로 수를 놓은 이 것은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지면  휴식한다는 나시족의 근면한 생활 방식을 반영 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정확한 연원은 나시족도 모른답니다.

허리에는 북두칠성 동그라미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태양을 상징 하고 하나는 달을 상징하는 띠를 합니다.

해가 뜨기 전에 나가서 일을 하고 달이 나온 다음에 집으로 돌아온다. 즉 부지런 한 모습을 상징 하는 것입니다.

나시족의 의복은 청색과 흑색, 백색이 주를 이룹니다. 나시족은 하얀색을 숭배 합니다. 

 

  본래 여자들이 일을 많이 하고 있지만 경제권도 여자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이드의 장황한 설명을 25분여 듣는 동안 여강 시내에서 빠져 나와 214국도의 산간 오르막길을 계속 오르고 있는데,

우측 나무 숲 사이로 여강 시내 전망이 보이는데,

여강 시내 중심부에는 높은 건물이 거의 없고 검은 기와집이 멍석 깔아 놓은 듯이 펼쳐져 있고 변두리 지역은 하얀 콘크리드 건물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다.

 

  계속 하여서 가이드의 계속된 설명으로.......

  여강 마을에는 몇 가지 특산물이 복숭아(중국에서 설도), 감자, 빨간 고추가 특산물입니다.

 

  여강이 지진대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보게 되면 50년 만에 한 번씩 대지진이 일어나게 되는데 1996년 2월 3일에 7급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는 지진에 대하여 고마워한다.

그 때 당시의 상황 때문에 높은 건물을 건축하지 못하게 한다. 계속 허용 안하다가 나중에 허용하는데 13층으로 건축허용,

 

  여강 고성에 가 보게 되면 대부분 목조 건축물이기 때문에 지진으로 인한 사람은 많이 죽지 않았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이 많이 죽었지만 안에 있는 사람은 많이 죽지 않았는데 왜냐 하면 일반 건축물은 지진의 흔들림으로 다 넘어졌지만 목조 건축물은 넘어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서 목조 건축물을 만든 이유가 있고, 현지 사람들을 보면 옛날에 많이 당해 보았기 때문에 우울한 성격이 아닌데 지진 때문에 옛날부터 복장면에서 어둡게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동하다 보면 오른쪽에 호수가 보이는데 호수 이름이 나시해가 있는데, 오늘은 일기가 좋지 않아서 옥룡설산이 보이지 않고, 일기가 좋을 경우에는 시내에서도 눈이 덮여 있는 옥룡설산이 항상 보이는 만년설을 말하는데,

나시해는 하나의 관광지로 보기 드문 학 들이 있고 그 외 많은 조류가 있어 시청에서 말을 이용하여서 사람을 태워가지고 한 바퀴 돌아오는 코스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차마고도의 그때 당시 급하게 갈 때 여강에 머무르지 않고 급히 북상 하게 될 때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나시해를 끼고 가는 하나의 길이였습니다.

일기가 좋을 때에는 큰 호수에다가 맞은편에 있는 옥룡설산 까지 합치게 되면 경치가 멋있었습니다.

요즈음 같은 경우에는 명절 같을 때 친구들 하고 같이 와서 돼지 바베큐 하고, 마작도 하고 이러면서 시간을 천천히 보내면서 보내고 있다.

나시해라는 “나”는 옛날에 황폐했다는 뜻이고 “시”는 새로운 시를 얻다 라는 뜻이고 “해”는 운남성에는 바다가 없어서 바다“해”자를 사용해서 나시해 라고 한다.

 

  차마고도에 대하여      -Naver 인터넷에서-

  생명의 신이 내린 잎사귀, 차(茶)   

윈난성의 푸얼시,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로 지난 2001년 기네스북에 오른 차나무가 있다.

공식 명칭은 천가채 1호 고차왕수, 이 고차수의 나이는 사람으로 치면 약 2,700세, 높이 약 26m, 폭 역시 20m가 넘는 커다란 고목이다.

윈난성 남부지역에서는 이렇게 크고 오래된 고차수를 어렵지 않게 발견 할 수 있다. 이 지역의 고차수 들은 세상의 모든 차나무들의 어머니 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윈난성은 인종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차를 재배하는 소수 민족은 제각기 다른 차신을 모시고 있다.

란창현 징마이 촌의 브랑족은 해마다 4월, 차 수확을 하기 전에 산강제를 지내는데 이것이 바로 차나무 신에게 올리는 제사다.

 

차신은 처음 브랑족에게 금은보화를 내리면 금방 써버릴 것이요,

소를 내리면 먹어버릴 것이니 금과 소 대신 이들에게 차나무를 내렸다고 한다.

이들은 신에게 햇차를 바치며 풍성한 차 수확을 기원한다.

 

  차, 길을 열다

  중국 윈난, 쓰촨에서 티베트를 넘어 네팔, 인도까지 이어지는 약 5,000㎞의 문명교역로, 차마고도,

그 시작은 중국 당나라와 티베트 토번 왕국이 차와 말을 교역하던 역사에서 비롯한다.

 

  쓰촨성 야안의 오려진 선사가 7그루의 차나무를 심어 중원의 황제에게 차를 바치기 시작한 이후 당나라 때부터 황족과 귀족을 중심으로 차는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는다.

  이후 차는 비단과 함께 중국의 가장 귀한 수출품이 되었다.

 

  군사력에 있어 당나라와 거의 대등한 위치에 있던 토번왕국은 수시로 당의 변경을 침략하여 당나라 왕실 공주와의 혼인을 요구하였다. 이를 견디다 못한 당태종은 서기 641년 문성공주를 토번왕 송첸캄포에게 출가시키는데 이때 문성공주와 함께 불교, 그리고 차가 토번왕국으로 전파되었다.

 

  풀 한포기 자라기 힘든 불모의 초원에서 차는 유목민들이 비타민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티베트인들에게 ‘차는 피요 생명“이며 하루도 차를 안마시면 살 수 없다고 한다.

 

   당나라 이후 중원의 제국들은 북방 유목민족과 싸우기 위해 티베트의 강인한 말이 반드시 필요했고 토번왕국은 생존을 위해 차를 필요로 했다.

차와 말의 교역은 급속히 번성했고 수천 년을 이어 오면서 문명과 문명을 잇는 길이 만들어 졌다.

 

  티베트의 슬픈 역사, 차

  중국 역사의 흐름에 따라 숱한 왕조가 교체 되었다.

당, 송, 원, 명, 청 그러나 이런 왕조 교체에도 불구하고 모든 왕조가 일관되게 사용하던 정책이 있다.

이차역마(易茶易馬) 즉 차로서 말을 바꾸라는 정책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정책은 약 천 년 간 이어졌을까? 당나라 시대에는 본격적인 차와 말의 교역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오가는 승려에게 의해 일정량의 차가 티베트로 들어왔고 그것은 일부 승려와 지배계층에만 제공되었다.

 

  이것이 송나라를 거쳐 원, 명, 청으로 가면서 본격적인 국가무역이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노림수가 있는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하나는 말이요, 하나는 차를 통해 티베트를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서장인은 버터나 치즈(乳酪)을 좋아하며, 차를 얻지 못하면 곧 병이 생겨 곤란하다.

고로 당, 송(唐宋) 이래 이차역마(易茶易馬)의 법으로 그들을 제압한다.(明史食貨志)

 

  송나라까지 대등했던 차마무역은 토번왕국의 멸망 이후 급격하게 변화한다.

지역 토호와 사원의 라마들은 차를 얻기 위해 명나라에 말을 조공 바치고 군신의 관계를 서약한다.

 

  당나라 때 문성공주에 의해 전래된 차는 이제 티베트인의 운명과 티베트의 역사를 좌지우지 하는 물품이 되고 말았다.

 

  차마고도의 노선

  실핏줄처럼 연결된 차마고도의 길들은 일반적으로 8개의 노선으로 나눠진다. 그중 마방들이 주로 이용하던 윈난성에서 티베트로 이어지는 길,

차마사 라는 관청을 두고 국가가 주도하던 쓰촨성에서 티베트로 이어지는 길 등이 대표적이다.

 

◆ 윈난성(시솽반나-쓰마오-대리-리장-샹그릴라-더친)-티베트-네팔-인도

◆ 쓰촨성(야안-대도하-캉딩-더거)-티베트-네팔-인도

 

  거대한 횡단산맥과 히말라야산맥으로 가로막힌 차마고도는 그 어느 길도 인간이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험한 길을 긴 휘파람 소리 하나로 견디며 누빈 차마고도의 주역들, 바로 마방의 대장인 마거토와 말몰이꾼들이 있었을 뿐이다.

 

  마지막 마궈토의 증언

  마궈토 선소우, 그는 마방의 회계책임자로 1940년대 윈난성 리장에서 인도까지 차마고도를 다녔다.

차마고도의 전 구간을 누비고 다녔던 마방들 중 현재까지 생존해있는 유일한 마궈토이다.

 

  “나는 리장에서 인도까지 직접 차마고도의 전 노선을 다녀봤다,

리장에서 출발하여 108일을 비바람 눈보라를 맞으며 라싸까지 갔다.”

 

  그가 들려준 마방의 노래

  부인) 30일 저녁에 결혼하고 초하룻날 길을 떠 난다구요?

당신 정말 양심도 없군요.

떠나나려거든 나랑 결혼이나 하지 말지.

나랑 결혼했으면 떠나지나 말지

 

  마방) 당신과 결혼 하느라 빚을 많이졌네

가지 않으면 빚을 갚을 수 없어

 

  부인) 당신이 빚을 졌어도 괜찮아요.

내가 베를 짜서 빚 갚는데 도울께요

 

  마방) 당신이 천을 짜도 충분치 않아

베 짜는 것으로는 담배도 사 피울 수 없어

 

  부인) 당신이 빚을 졌어도 괜찮아요.

노새를 팔아서 갚으면 되지요 

집 앞에 있는 밭을 팔아서 갚으면 되지요

돌도 기와장도 말할 수 있는데 왜 당신은 대답이 없나요?

 

  소박한 노래 말에 당시 말몰이꾼과 마궈토, 그리고 그들 가족의 애환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떠나지 말라는 새 신부 앞에서 끝내 마방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들 앞에 놓인 길, 그 길이 바로 차마고도 이였기 때문이다.

-KBS 차마고도 취재후기-

http//blog.naver.com/nada5582/10116026400

 

  마방의 전설. 노부상부

  마방은 수 십 마리의 말과 간마런(말잡이)으로 이루어진다.

마방의 선두 말은 항상 2필, 티베트어로 “통로요로”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특별한 장식을 한다. 그리고 말에는 항상 방울을 단다.

마방에 관한 모든 것은 노부상부의 전설에 따라 이루어진다.

노부상부는 티베트, 인도, 중국을 잇는 마방의 길을 처음 개척한 것으로 알려진 전설적 인물로 7전8기 끝에 이 험한 길을 개척한 상인이다.

               -Naver 인터넷에서-

 

  신비의차 보이차       -Daum 인터넷에서-

  한문으로 茶라는 문자를 풀이하면 초두가 艸으로 열십이 두개니 숫자로 20이요,

거기에 八十八(팔십팔)의 88의 숫자를 더하면 108이 된다.

이 108의 의미는 즉 차를 마시면 108세까지 건강하게 장수 한다는 비결.

이것이 중국인들이 갖는 차(茶)라는 글자의 개념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은 세계 차 생산량의 20%이상을 생산하는 茶의 나라이다.

 

  중국의 한 해 차 생산량은 약54만 톤으로 우리나라의 약700배 이상이다. 그 중 녹차 60%, 홍차 20%, 우롱차 6%, 간압차가 5%이며 나머지 차 중에 약간의 극소량이 운남 보이차이다.

차의 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차를 B.C 2700년경인 신농(神農)시대 때부터 마시기 시작했다한다.

 

  일부 학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차 문화가 민중 속으로 보편, 보급화 되지 못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물(水)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물이 어느 곳 가릴 것 없이 너무나도 좋아 굳이 차로 마실 필요가 없었다는 이유다.

하지만 중국은 이와는 반대로 물이 좋지 않아 도저히 생수로는 마실 수 없었고, 그 연유로 차 문화가 일찍이 개화되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음식은 어느 음식이라도 기름에 볶고, 튀기기 때문에 식후의 차 한 잔을 빼 놓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가히 차(茶)중의 王이랄 수 있는 차는 바로 운남 보이차를 가리키는 형언으로 황실과 대갓집, 대부호들만이 애용하는 전유물로써 최고의 명품 대접을 받은, 중국이 세계에 내놓아 자랑하는 국보적인 최고의 명차다.

이렇다 보니 작은 규모의 공장, 영세성 공장, 가정에서 생산하는 수도 없이 많은 제품 등이 위생처리가 미흡하거나 공정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문제점이 있다.

 

  다른 성(省)의 회사들이 이러한 생산품을 구입하여 재포장 처리하여 새로운 상품명으로 내수판매, 수출하고 있으며 특히 대만, 과거의 홍콩에서 이러한 상행위를 많이 하였다.

 

  그러므로 근래에는 포장형태, 디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원산지가 운남성내 서쌍판납 이어야 하고 정식으로 등록된 큰 규모의 茶 전문회사의 제품인가를 확인하여야 한다.

집안 대대로 만들어져 온 보이차의 전통이 중국 공산주의의 등장과 함께 그 맥이 끊겨 오래된 보이차는 중국현지에서조차 흔치 않다고 한다.

 

  또한 영국인들이 자랑하는 홍차보다 우수한 보이차를 발견하고는 과학적, 의학적 분석 연구 실험한 결과 차의 진미와 약재효능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홍콩인들을 앞세워 운남성내 오래된 보이차를 헐값에 사재기하는 관계로 분류상 장기간에 걸쳐 자연 숙성시키는 후 발효차인 「운남 보이차」는 거의 구입할 수 없다고 현지에서는 단정한다.

 

  보이차

  옛날에는 사람들이 차를 왜 “萬病之藥”이라고 하였는가? 차를 만병지약(萬病之藥)이라고 하는 말은 당나라 진장기(陳莊器)의 「본초유(本草遺)」에서 기원되는데 이 책에 쓰여 있기를 “‥‥‥‥제약(諸藥)은 각병지약(各病之藥)이고 차(茶)는 만병지약(萬病之藥)이라고 하였다.

중국 양대(梁代)의 도홍경도 차를 늘 마시면 경신환골(經身換骨)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운남 보이차란?

  보이 차는 운남성 보이현에서 직접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경치 좋고, 험준하고 산세 수려한 서쌍판납 이라는 곳에서 자란 고급 차 잎으로 생산된 것을 의미한다.

발효성분과 타닌 성분이 많이 함유된 대엽 종의 차 잎을 후 발효 처리한 차이다.

다성(茶性)이 독하기 때문에 최소한 1년 이상을 자연적으로 발효시키는 방법이 다른 차들처럼 단 기간 내에 상품화 시키는 제품과는 판이하여 구별 화 된다.

 

  보이 차의 맛과 향은 매우 진하고 가히 매혹 서럽고 오랫동안 지속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5~6차례 반복 우려내 식음 할 수 있으며 그 진한 맛과 그윽한 향기, 차 색깔은 변치 않고 지속되는 특이한 성질의 명차다.

 

  보이 차는 후 발효차로서 잎을 그대로 발효 처리한 산차(散茶)와 틀을 만들어 수증기로 형태를 고정시키는 고형차(固型茶)로 구분되며 고형 차는 시기와 기호에 의하여 제조 생산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약이 되는 운남 보이차

  중국의 차 시장을 가보면 마치 된장떡이나 빈대떡, 개떡 벽돌장, 똬리 같은 모형을 가진 검정색, 등황색 덩어리차를 파는 것을 가끔 구경할 수 있다. 또한 잎 그대로의 보통 모양의 차가 대부분이지만 바로 이것이 보이차이다.

 

  좋은 차는 검정색을 띄는 것이 아니고 등황색을 띄어야만 고급제품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는 조선시대인데 사대부, 행세깨나 하는 양반네들의 환영을 받았다는 것은 「홍경주의 시편」에서도 알 수 있다.

중국의 「운남성지」, 「물리소지」, 「백화경」등의 기록을 보면 약리적 특성을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는 보이차를 약재 및 약용으로 사용하였으며 「본초강목십유」에 의거 약리적 특성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체내 지방질 및 콜레스테롤의 함량을 낮추고 제거 시키는 효과가 있고 장을 이롭게 하는 정장효과와 술을 깨게 하는 숙취제거 소화를 이롭게 하고 진액을 생성 시키는 작용을 하며 목의 통증을 완화 시키고 가래를 삭이는 작용을 하며 계속 음용하면 체중을 감량시키는 감배 효능이 있고 마음을 다스리는 스트레스 해소 특성이 있다.

성인병, 부인병에 탁월한 효능이 있어서 산사의 비구니 스님들이 즐겨 애용하는 구하기 힘든 「최고의 명차」이다.

 

음용방법

보이 차는 보통의 일반 차 다리듯이 2~3g의 찻잎에 100~150˚C로 끓인 물을 부어 3~5분 이상 우려내야 운남 보이 차 특유의 진한 맛과 매혹적인 그윽한 향기로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Daum 인테넷에서-

 

  위와 같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가는데 우기 철이라서 한번 구름이 끼기 시작 하면 언제 어느 때 비가 올지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는 상태에 우리가 출발 1시간가량 되어서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214국도가 여강에서 출발 15여분 까지 중앙선이 그려져 분리되어 있으나 그 후 해발 2,700㎞ 고개를 넘는 산악 도로에는 중앙선도 없는 도로에 우리가 탄 버스는 시속 5 ~ 60h/㎞ 로 그나마 서행하고 있는데 그 외의 차량(승용차)은 도로 경주 하듯이 추월하면서 급히 가는데,

 

  비탈길 내려가는데서 운전 부주의로 인한 승용차끼리 추돌하여 중국 경찰이 나와 있고,

다행히 우측 사면에 부딪치어 차가 멈추어 서있었고, 만약에 왼쪽 낭떠러지 얻으면 큰일 날 뻔한 사고였다.

 

                                                                                장강 제일만 전망대

 

  여기서 부터 우리가 승차한 버스가 더욱 조심조심 하면서 1시간 20여분 만에 해발 1,800m인 장강 제일만 전망대에서 10여 분간 휴식을 취하였다.

 

 

                                                                            장강 제일만 전망대 과일 상점

  이곳에서는 특히 과일 상점이 있었는데 모든 과일은 전부 저울에 달아서 판매 하고, 과일 중에 복숭아는 그 크기가 상당히 커서 먹음직하였으나 거의 복숭아를 사는 사람은 없었다.

 

장강 제일만 전망대에 올라가 구경하고 싶었으나 구경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고, 입장료가 15위안 이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장강의 물 흐르는 모습뿐이라고 한다.

 

  장강(금사강) 제일만은 여강에서 서쪽으로 약 40㎞ 떨어진 석고진에 위치하여 있다.

 

                                                                                     흙탕물인 장강

금사강은 청해성, 서장(티벳)을 거쳐 덕흠현으로 운남에 흘러들어 계속 남쪽의 횡단산맥 지역으로 흘러가고 석고진에서 절벽에 가로 막혀 V자 모양을 이루며 동북 방향으로 흐른다.

 

장강이 첫 번째 꺾이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만리 장강제일만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강이 V자로 휘는데 안 그랬으면 바다로 빠진다고,

여기서 휘어져서 다시 중국 내륙으로 흐르게 되고 장강(금사강)의 긴 여정이 계속 되는 것이다.

 

  우리는 휴식을 마치고 출발 하는데 여기서부터 약간 내려가다가 장강을 끼고 평지 길을 달리는데 장강의 물 색깔이 흙탕물로 이루어져 있고,

우측으로 지금 한참 여강에서 부터 호도협 까지 고속도로공사가 이루어져 지고 있어 이것이 완공 되면 현재는 2시간 30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40분 만에 갈 수 있다고 가이드는 말 하였다.

여강에서 호도협 까지의 직선거리는 17㎞입니다.

 

  계속 하여서 가이드의 설명으로.......

  우리가 호도협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호도협은 옥룡설산 제일 끝하고 하바설산 사이에 흘러 들어가는 양자강이 세 개가 합쳐져 이루어진 협곡입니다. 전설에 의하게 되면 사냥꾼이 호랑이를 쫓다가 호랑이가 큰 바위를 딛고 나서 협곡을 뛰어 넘었다.

이러한 전설 때문에 호랑이 “호(虎)”자 쓰고, 뛸 “도(跿)”자 쓰고, 협자는 두메 “협(峽)”자를 쓴다.

 

  옥룡설산 같은 경우에는 아직까지 처녀봉입니다.

제일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코스는 모레 우리가 올라가는 코스이고,

옥룡설산은 5,596m 이고 마주 보이는 하바설산은 5,396m 이다.

하바설산은 제일 북쪽으로 있기 때문에 눈이 쌓여 있고 크레바스가 있습니다.

하바설산 등반 시 반드시 피켈 하고 아이젠이 있어야 되고, 4,100m에서 야외 잠을 잘 때 많이 힘듭니다.

 

  겨울 낮에 5,000m에서 이동하는 것과 다른점이 밤에 4,100m에서 자는 것은 밤중에 기압이 떨어지고 산소 함량이 적으면서 두통이 거의 7 ~ 80%가 다 그런 증세가 생깁니다.

등반도 새벽에 합니다.

낮에는 바람이 세기 때문에 올라 갈 수 없어요. 새벽 2시부터 시작해서 오전 중에 마칩니다.

주봉 까지 올라가게 되면 옥룡설산, 대리설산도 보입니다. 여기서부터 대리 설산 까지는 7시간 더 가야 합니다.

 

  앞으로 트레킹 할 때는 상, 중, 하 호도협으로 이동 합니다.

하 호도협은 내일 빵차 타고 아스팔트길을 나가게 되면 모두 산이고 집도 하나도 없습니다.

양자강이 지나가면서 하 호도협 끝에 가게 되면 사금을 채취 하고 있고,

지금 양자강 물 색깔 보게 되면 지금 우기 철이 지나지 않았기에 비가 와서 산위에 흙을 씻어 내려서 강물이 흙탕물로 더럽고,

건기 때는 양자강 물의 색깔이 옥색입니다.

 

호도협의 특식으로는 토종닭의 백숙이 있는데 드실 분이 있으면 미리 이야기 해야만 예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도착 하여서 주문하면 오래 끓이기 때문에 시간상으로 오래 걸리므로 미리 예약하여야 만이 도착 하자마자 드실 수 있습니다.

그 이튼 날에 그 백숙으로 죽을 끓여서 드립니다. 

 

                                                                                             교두진

 

우리 일행은 한 테이블에 8명이 백숙 2마리씩, 2테이블로 하기로 하고 1인당 한화 10,000원씩 지불하기로 예약하였다.

 

  우리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사이에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잠시 쉬고 하면서 최종 목적지인 1,850m인 교두진에 총 2시간 35분 만에 도착 하여 빵차를 갈아타기 위하여 15분여 이상 기다리는 중에 빵차 1대에 8명씩 2 대에 나누어 탑승하여 일출소우로 향하였는데,

 

                                                                                              빵차

 

 

  이곳의 운전기사의 운전 솜씨를 보고는 감히 승차 할 수 없는 무서운 운전 솜씨이다.

왜냐 하면 올라가는 매우 좁으면서 급경사 커브 길에서도 감속도 없이 급커브를 그냥 핸들 조작하여 곡예운전을 하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 않는 기분으로 겁이 살며시 난다.

 

                                                                  호도협 트래킹 시작지점인 일출소우

 

  잘못하여 산에 부딪쳐서 밖으로 튕겨 나갈 경우에는 반대편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이 분명 하니까........  

15여 분간 가슴을 조이며 도착한 곳이 1,950m인 호도협 트레킹 시작점인 일출소우에 도착하여 간단한 준비물 점검과 휴식을 취한 후에 나시객잔을 향하여 출발 하였다.

 

 

                                                                                호도협의 개념도

  트레킹 코스(소요시간 총 6시간)

 

  일출소우(해발 1,950m) ⇒ 나시객잔(소요시간 1시간, 해발 2,250m) ⇒ 28밴드(소요시간 1시간 50분, 해발 2,670m) ⇒ 차마객잔(소요시간 1시간 30분, 해발 2,400m) ⇒ 중도객잔(소요시간 1시간40분, 해발 2,345m)

 

  호도협의 트래킹은 페루 맞추피추, 뉴질랜드 밀포드와 더불어 세계 3대 트래킹 중 하나로 불리며,

호도협은 5,000m가 넘는 두 개의 설산 즉 옥룡설산(5,596m)과 하바설산(5,396m) 사이를 흐르는 협곡인데,

협곡의 흐르는 물의 높이는 해발 1,700m로서 협곡을 흐르는 금사강 사이로 강을 따라 호랑이가 건널 만큼 좁다는 뜻의 호도협 전체 약 28㎞ 트레킹 코스중 16㎞의 길이에 해발 2,000m(한라산 해발 1960m 보다 높은 산 길)에 달하는 길게 이어지는 시원한 물줄기와 설산이 만들어 내는 웅장함이 어우러져 세계의 많은 트래커 들에게 매혹적인 트래킹 코스로 알려져 있는 산행 길을 이렇게까지 뚫고 다듬어 놓은 그들의 천년 차마고도의 마방옛길,

 

  호도협은 엄격한 규정을 적용 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깊고 강 협곡 수위를 다툰다.

협곡의 거주자들은 원래부터 소수의 적은 부락을 이루고 살아가는 토착인 나시족(納西族)이다.

 

  금사강의 이름은 강 상류에서 사금을 채취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사계절 흐르는 물의 색깔이 약간씩 다르다고 하고, 특히 겨울철은 푸른 옥빛을 띤다고 한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 에베레스트(8,848m)는 2012년 3월 11일 네팔에 내가 여행 시 가이드에게 들은 설명으로 전 세계에서 약 2,200여명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등정 했다고 설명을 들었는데,

중국 운남성의 여강에 있는 옥룡설산(최고의 주봉 선자두(扇子陡) 해발 5.596m) 주봉은 아직 까지 아무도 정복을 못한 산이라고 한다.

 

  히말라야 산맥의 끝자락으로 5,000m이상의 높은 봉우리가 13개나 있고 4,000m가 넘는 봉우리는 72개로 이루어져 길이 36㎞, 넓이 16㎞나 뻗어 있는 옥룡설산에는 이 산을 신성시 여기며 살고 있는 소수민족인 나시족 들이 있다.  

 

  인류 최고의 교역로인 차마고도, 그 험난하고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과 걷기 열풍에 힘입어 트래킹 코스로 재조명을 받고 있다.

우리들은 옛 차마고도에서 물건을 교역 하던 산업집단인 마방이 만든 낭떠러지 길을 통해 차마고도의 자취를 따르고 있다.

 

  산으로 가는 길에는 통즉등산(通卽登山)이요. 궁즉입산(窮卽入山)인 것을,

  “등산”은 땀을 흘리고 육산(흙으로 덮인 산림)의 영기를 받기 위해 운동하면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스스로 힘들게 산을 오르는 것이요.

즉 세상을 살면서 무거운 배낭에 현세에 찌든 공해를 잔뜩 지고 힘든 산을 오르내리며 땀으로 모든 것을 씻어 내면서 즐거움을 삼는다.

걷지 않으면 모든 걸 잃어버리듯 다리가 무너지면 건강이 무너진다.

 

  “입산”은 인생에 있어서 좌절과 실패 그리고 곤궁한 처지에서 해답을 모색하고, 구원을 갈구하여 골산(바위 산)의 정기를 받으려는 가는 산길이다. 즉 낙망과 세상을 등지거나 불치의 병을 얻거나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 조용한 산을 찾는다.(입산수도)

 

 

                                                                                   호도협 트래킹

  나와 사위 하고 여태까지 경험 하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과 힘듦과 하늘과 좀 더 가까이 땅의 원류와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가고 싶은 곳으로 등산 하고자 한다.

 

 

  마침 옥룡설산의 노여움이 풀려서 비는 오지 않고 엷은 구름만이 우리의 뒤를 따라 오고, 출발지 입구에서부터 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 따라 경사진 밭에 옥수수가 여물기를 수확하기 기다리고 있으며,

앞 사람을 따라 열심히 걷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부터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뒤에서는 말(노새) 와 나시족의 마부가 계속 따라 붙으며 타고 가라고 무언의 압박을 하며 따라오고 누군가 걷기가 불편함을 기다리며 꾸준히 말(노새)을 몰면서 따라 붙는다.

 

  중간 중간에 배설해 놓은 노새의 분비물이 발에 밝히기나 하면 더럽고 하여 눈에 거슬리고,

우리는 말을 탈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도리질 하여도 막무가내다.

 

                                                                             호도협곡 아래 금사강

 

  나는 길이 험한데다 운무에 덥힌 산과 주변 경치를 사진 찍다보면 잠시 지체 하였다가 다시 걸음을 빨리 하여서 따라가기도 해야 하는데 말들이 바로 근접해 있으니 피할 수도 없고 어찌할 수 없었다.

 

  저 아스라하게 깊은 협곡 아래에 금사강이 흐르고 그 강변을 따라 포장도로(해발 1,700m 지점)가 나 있지만 우리는 하바설산의 산 중턱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계단식 옥수수 밭이 산허리 까지 잘 조성 되어 있고 마을은 이 깊은 골짜기 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건너편 옥룡설산 쪽은 급경사 지역으로 농가도 없고 경지도 조성 할 수가 없는 곳이다.

 

  협곡의 발치 아래에는 어림짐작으로는 30m 넓이의 금사강(장강, 양자강)의 흙탕물이 포호 하듯이 흐르고 건너편에는 옥룡설산 모습은 운무에 휩싸여 얼굴도 내밀지 않고,

우리가 트레킹 하는 길은 하바설산의 산허리로 더욱 더 하바설산의 정상을 볼 수 없으며........

 

                                                                      사진찍기 좋은 장소(빨강 깃발)

 

  1시간 정도 약간의 굴곡은 있었지만 그렇게 힘들지는 않은 평탄 굽은 길에 빨간 깃발이 서 있는 곳이 사진 찍기가 좋은 장소이지만 아무도 없다 하여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나시족 할머니가 와서 장소 사용료를 내라고 한다.

  

 

                                                                    목을 적시고 가라는 음료수 판매대

  이유인즉슨 호도협은 나시족의 관광 개발지로서 깃발 세운 장소는 특정 나시족 개인이 개발 하였다고 하여서 사용료를 징수하는 곳에는 반드시 움막에서 음료수나 과일을 판매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사진 찍을 때는 장소 사용료 3위안을 징수한다고 가이드가 귀띔 하였다.......

 

  발아래 금사강을 보면서 건너편 옥룡설산의 옛날의 차마고도 길도 걷다보면 목마른 사람은 목을 적시고 가라고 음료수와 과일을 판매하는 나시족 할머니들이 막을 치고 장사를 하고 있으며.......

 

                                                                   보란 듯이 말 타고 가는 나시족 마부

 

  이곳 지형이 남쪽이라서 선인장이 서식하고 나시족 마부는 우리들을 보란 듯이 편안하게 자기 말을 타고 뒤 따라 압박 하고,

 

                                                                          바위에 쓴 나시객잔 안내 표시

간혹가다 바위에 나시객잔 방향 표시를 붉은 글씨로 써 있는 것 보면서 걷다 보면 저 멀리서 마을이 나타나 내 앞으로 다가와 1시간 정도 젊은 사람 뒤를 부지런히 힘들게 걸어가니 마을 중간에 있는 나시객잔 이라는 곳 11시 40분경에 도착 했다.

 

 

 

                                                                       옥수수 걸어서 말리는 이국적 풍경

  나시객잔에 들어서니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옥수수를 걸어 놓아서 말리는 이국적 풍경과 국화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곳이지만 해발 고도가 높아서 걷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별 느낌이 없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처마 밑 탁자에 둘러 앉아 우리나라 6, 25때 알량미(당시의 발음)라는 쌀로 밥을 지어 먹은 것과 같은 이 지역의 안남미(安南米)로 밥을 지어도 푸석푸석하고 불면 날아 갈듯해서 먹을 때는 배가 쉽사리 불러도 금방 꺼지고 마는 안남미 밥 하고,

                                                                          점심에 안남미 쌀밥하고 반찬들

토마토 하고 감자볶음 등 5가지 반찬 하고 이곳에서 구름 속에 가려진 옥룡설산을 바라보면서 점심 식사 한 후에 12시 40분경에 빗방울이 간간이 내리는데,

 

 

  오늘의 제일 힘든 코스인 28밴드를 향하여 나시객잔 후문으로 나서니 생산된 보이차를 몇 개월(마방은 약 6개월 이상 소요)씩 이런 길을 말에 싣고 가서 생필품으로 바뀌어야 하는 고달픈 삶이 아니었을까 싶다.

 

                                                                           비가 그친 후의 옥룡설산

 

  비는 오지 않지만 구름에 쌓여 있는 옥룡설산을 바라보면서 28밴드를 오르기 시작하는데 약 7 ~ 80도의 경사지를 구불구불 길로 이어져 있어서 웬만한 약한 체력 갖고는 오르기 힘든 구간을 잠시 쉴 겸 해서 사진 찍으면 뒤에서는 말과 마부가 빨리 가라고 재촉을 하고,

 

  이 힘든 구간에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느낌을 받는 것을 사위가 알아차리고는 잠시 일행이 휴식 하는 중에 내가 메고 가는 배낭 속에는 내일 갈아입을 옷과 물 2병과 허리가방이 들었는데,

그중에서 물 1병과 허리 가방을 꺼내서 사위 배낭에 넣고, 물 1병은 장사하는 나시족 할머니한테 주었다.

 

  그러고 나서 사위의 배낭은 무거울 테지만 나는 한결 배낭의 무게가 가벼워서 걷기가 수월 하였으나,

나로 인하여 사위에게 짐을 부담하게 한 미안스런 마음이 나의 뇌리에서 다리 힘 하나 믿고 이역만리 산행 온 내가 이렇게 체력이 달리다니,

 

  세월과 함께 무심히 떠나버린 연령 돌이킬 수도 없는 흘러간 세월 동안에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았는데,

이젠 마음도 몸도 지쳐서 그 조그마한 무게를 사위에게 의지하여야 하는 황혼의 인생,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나서야 알았으니 이제는 조금 남아있는 황혼 길이지만 보람차고 멋지게 나를 위한 삶을 살아 보리라고 심기일전 마음속으로 다짐을 해본다.

 

  고맙고 따스한 정으로 대해준 사위 엄 서방이 정말로 고맙고 행복했다. 행복에 겨워 올라가는 트레킹 길이 한 결 쉬운 것 같았다.

 

  총 16명이 함께 이번 트레킹 여행에서도 50대 후반의 4명은 그저 앞으로 가기가 바쁜 선두 그룹으로 땅만 보고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0대 중반과 4 ~ 50 중반의 일행은 서로 앞 다투어 선두 그룹을 쫓아가기가 바쁜 일행이 있고,

 

 

                                                                           28밴드 올라가기 시합 전

  50대 중반의 부부는 부인이 허약 체질로 남편이 뒤에서 살피면서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초등학교 6학년 정도 되는 학생은 자기 아버지보다도 앞서서 선두 그룹을 따라가느라 진땀 흘리고,

 

                                                                                   선인장 군락지

나와 사위 하고는 올라가는데 힘은 들지만 그래도 여유 있게 사진도 찍고 즐거워하는 사람, 참 다양한 인간상을 만나게 된다.

 

 

  길은 정말 험하고 경사가 심하지만 위도 상으로 남쪽이라 선인장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이름 모를 야생화를 보고,

뒤 돌아보면 옥룡설산은 부드러운 솜이불로 덮여 있고, 경사면에는 나시족의 부락이 비탈면을 이용해 경작지와 같이 군데군데 이루어져 있으며, 

 

 

                                                                         힘든 28밴드라는 벽에 쓴 글씨

 

                                                                    인재여도(人在旅途)부터 힘든 28밴드

  뒤 따라오는 말(노새)의 워낭 소리 들으며 힘들게 30여분 올라가니 인재여도(人在旅途)라는 곳에서 우리 일행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50대 중반의 부부의 후미그룹이 올 때 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트레킹을 시작하는데 여기부터 힘든 28밴드라는 벽에 쓴 글씨를 보고,

 

 

  나와 사위는 중간 그룹에서 구름이 낀 옥룡설산을 방긋이 웃기만을 기다리며 올라가고,

야생화도 즐기며,

힘들어도 여유 있게 사진 짤칵 하면서,

구름에 가려진 옥룡설산이 웃을 때를 기다리며 바라보고,

발아래 저 멀리 보이는 상호도협을 바라보고,

 

                                                                           28밴드 아래서 본 금사강

금사강의 굽이진 물길 강변 따라 난 도로가 있지만,

 

우리는 하바설산 산허리 길로 이어진 차마고도의 길을 따라 힘들게 걸어 올라가니,

 

 

                                                                     나시족 할머니의 음료수 판매대

  삶이 무엇인지 이 높은 곳에서 움막을 지어놓고 나시족 할머니는 몇 가지 과일과 음료를 약간씩 놓고 지나가는 등산객이 목이 말라 사 줄 때만 바라보고 있고,

 

외국인 들은 여유 있게 천천히 담소하면서 올라가는데,

우리 일행은 한국 사람의 기질이 있어서 무엇이 그리 급한지 조금도 쉬지 않고 옆도 쳐다보지 않고 올라가기에 바쁘고, 정상이 가까워지니까 뒤에서 따라오든 말(노새)과 마부는 오지 않고,

 

  급한 경사면이 너무 힘들어 갈지(之)자로 산을 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상대적으로 시간은 더 걸리게 마련이다.

힘을 덜 들게 하기 위해서는 걸음을 더 많이 옮겨야 하고 시간은 더 걸리게 된다.

세상살이에서도 어려운 길을 피하다 보면 결국 정상에 오르기까지 더 많은 걸음을 걸어야만 한다.

그래서 힘들어 보이는 길일지라도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내가 이 길을 걸음으로써 나에게 생각할 과제를 보면 내가 젊은 시절 생활에 있어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정면 승부를 거는 대신에 그것들로 부터 도망치면서 생활해 왔던 것이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은 최대한의 정면 승부가 명제일까라고 생각 한다.

 

  1시간 25분여 만에 28밴드(해발 2,670m) 정상에 도착 하니 가이드가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나는 이곳에서 더 가야 정상이 나올 것이라 생각 하고 내리막길을 10여분 정도 내려와서는,

  사위에게 왜 정상을 가는데 내리막길이냐고 물으니,

  사위가 하는 말이,

  아까 가이드가 앉아 있던 곳이 정상이라고,

 

                                                                                  28밴드 정상

  가이드가 말 하였다 하기에,

 

 

  그러면 나는 28밴드 정상의 사진을 짤칵 하지 못 하였으니 되돌아가서 사진을 찍고 오겠다고 하면서 되돌아가니,

사위 엄 서방도 나를 따라 뒤 쫒아와 10여분 이상 올라가서 사진을 짤칵 하고 내려오는데 소요시간이 약 20여분이 지나 도합 30여분을 소모 하였다.

 

 

                                                                      차마객잔 앞에서 기다리던 가이드

  그 동안 우리 일행은 먼저 앞서서 내려갔고 나와 사위하고는 내리막길 조심 하면서 여유 있게 주변을 보면서 내려오는데 앞서 가던 외국인 4명과 중국인 6명은 천천히 여유를 갖고 담소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나서 부지런히 앞질러서 내려오는데,

 

 

  옥룡설산과 하바설산이 나와 사위의 행동에 노여움을 사셨는지 비가 오기 시작하여 우리 둘이는 배낭의 우의를 꺼내 입고 20여분 부지런히 걸어서 해발 2,450m의 차마객잔 앞에서 가이드는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서,   

  늦게 와서 미안 하다고 하니까,

  가이드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일행 일부가 차마객잔에서 맥주 파티

  우리를 다독여주어서 객잔 안에 들어가니 눈에 먼저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꽃이지만 다른 일행은 처마 밑에서 탁자에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고,

 

먼저 온 우리 일행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맥주 파티가 벌어져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나하고 사위  한테 맥주 한잔씩 주어서 먹고 한 15분여 있으니 비가 서서히 그치였다.

여기 차마객잔 역시 옥룡설산을 바로 마주 하고 있었으나 옥룡설산이 무엇이 노여웠는지

                                                                  나시족 부락의 건물 2층이 옥수수 건조장

 

 

 마음을 굳게 닫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비가 그쳐서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중도객잔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마을 지나오면서 건물을 보니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2층은 창고 겸 곡식 저장고로 사용되어 있었다.

 

                                                                           하바설산 비탈면에 염소들

트레킹 길 아래 경사면에는 나시족의 부락과 계단식 경작지에서는 옥수수가 한참 수확을 기다리고 있으며,

 

일몰이 가까워서 집에 가려고 하는지 위험한 경사진 산비탈에 염소들이 산을 태연히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한 사람만이 지날 수 있는 험한 트레킹 길 아래는 흙탕물의 금사강이 흐르고,

건너편 옥룡설산은 얼굴을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내 스타일로 페이스를 유지 한다면 험한 산길도 끝까지 갈 수 있다.

남의 보폭에 맞추거나 누구의 속도를 따르면 쉬 피곤해 질뿐만 아니라 산에서 맛 볼 수 있는 즐거움이 다 달아나게 마련이다.

인생살이에서 자기 페이스를 지키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는 일이 중요한 까닭도 마찬가지 이유 일 것이다.

 

  이곳 호도협의 트래킹 코스는 따로 지도가 필요하지 않았다. 길은 어차피 한 갈래이고 곳곳 마다 영어와 화살표로 된 하나 밖에 없는 차마고도를 따라 걷다.

                                                                     하바설산 경사면에 위치한 나시족 민가

보면 크고 작은 민가들이 띄엄띄엄 하바설산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곳 나시족의 급수를 사용 할 물의 공급을 하바설산에서 100㎜ 관을 통해서 급수를 공급 하고 있으며,

 

                                                                       장씨객잔으로 올라가는 포장도로

가파른 계곡 낭떠러지 길을 걷고 걸으면서 차마고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저 멀리 장씨객잔으로 올라가는 포장도로를 보면서 건너편 옥룡설산의 수직으로 가파른 산을 경치를 벗 삼아 걸어가면 중도객잔 부락 입구에 도착 할 즈음에,

 

 

 

                                                                      가을 재촉하는 코스모스 화냥기 웃음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가을의 전령 코스모스 꽃이라 무심히 그냥 보고 지나쳤지만 부락 입구에 가까워지자,

 

나 여기 있어요, 나 여기 있어요, 꽃잎을 흔들며 웃고 있는 저 촉촉한 화냥기 웃음, 그냥 저것들을 붙잡고 가을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가을 재촉 하는 바람소리 들으며 도착 한 곳이,

호도협에서 제일의 풍경을 자랑하는 중도객잔으로 현재 시간 17시 35분 경이였다.

 

 

                                                                          중도객잔 처마밑 수건 말리는 모습

  중도객잔에 들어서니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은 날씨가 흐려서인지 모르겠으나 처마 밑에 수건을 걸어서 말리는 풍경이 낯설지 않고, 먼저 온 일행들은 옹기종기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고,  

 

 

  우리 일행은 객실이 1, 2, 3층으로 나누어져 있는 객실을 배정 받는데, 나는 1층 102호실을 배정 받아 들어가는데,

바로 계단 밑이라 시끄러워서 가이드에게 이야기 하여서 다시 105호실로 바꾸어 객실에 들어가니 시설은 볼 것이 없는 외풍이 심한 구조였지만,

 

  오늘 땀에 젖은 몸을 샤워로서 몸을 푸는데 샤워물이 미지근한 물만 나와서 참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몸이 떨리며 바로 감기 기운이 내 몸을 습격하여서 감기약 복용하고 밖으로 나와서 처마 밑 테이블에 서울에서 혼자 온 45세 정도의 중년과 같이 사위하고 담소하고 나서,

 

                                                                           중도객잔 식당 2층 전망대

 

  식당 2층 옥상에 올라가니 우리일행 이외에 외국인 및 다른 일행들이 있고, 중도객잔 높이 해발 2,345m를 표시해 놓았고, 사위가 맥주를 사와서 같이 먹으며 담소 한 후에,

 

  저녁 만찬시간이 되어서 식당으로 내려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한국인이 중도객잔에 다녀간 흔적

식당의 천장과 벽에는 여기에 다녀간 한국인의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걸어놓은 각양각색의 나름대로 써온 프랭카드 벽을 뒤덮어 있다고 표현 하여야 맞을지 모를 정도로 되어 있었다.

 

 

  우리일행이 한 테이블에 8명씩 두 테이블로 나누어 앉아서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안남미 밥 하고 명칭이 오골계백숙이라 하지만 오골계가 아닌 검은색의 닭백숙이라 안주가 있으니 술이 빠질 수가 없어서 일행 중에서 고량주를 사서 같이 잔에 따르고 건배를 하고서 약간 질긴 닭고기 하고 고량주를 곁들이니 외국이라서 그런지 그 맛이 색 달라서 오늘의 최대의 만찬 이었다.

 

                                                            저녁 만찬에 검은색의 닭고기 와 안남미 밥에 반찬들

 

  나는 만찬이 끝난 다음에 술도 취하였거니와 몸도 피곤하여 침대에 전기장판의 온도를 높여서 피로를 충분히 풀 수 있을 만큼 따뜻하여 일찍 들어 누워서 깊은 숙면을 하였다.

 

사위는 서울에서 혼자 온 45세 중년을 만나서 술 한 잔하고 오겠다며 나가 서로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 22시경에 들어와서 취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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